광개토 대왕릉 비문 내용
 
  광개토 대왕(374~412)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 대왕이라고도 불렸다. 본명은 담덕이고, 고국양왕의 아들로 고국양왕 3년(13세, 386)에 태자로 책봉되고, 18세인 391년에 즉위했다. 그는 소수림왕대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의 비문에 보이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긴 시호는 그의 영토 확장의 업적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만주 지방은 물론 한반도 북부 지방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광개토 대왕릉의 비는 414년에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옛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현) 동북쪽 4.5㎞에 있다. 비의 높이는 6.39m, 각 면의 너비는 약 1.5m, 무게는 약 37톤이나 되며, 불규칙한 장방형 기둥 모양이다. 비의 4면에는 예서체로 된 44행 1,775자에 달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글자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14~15㎝이다. (비문의 글자 수에 대해서는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에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라는 설도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즉, 서두에는 고구려 건국자인 추모(주몽)의 신이한 출생담과 건국담,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 대왕까지의 세계와 약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록되어 있고, 본문은 광개토 대왕 재위 시의 영토 확장 사업의 주요 내용이 연도별로 새겨져 있으며, 국경 지대의 통치권 확인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끝으로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개토 대왕은 예성강을 경계로 백제에 대해서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광개토 대왕 2년(19세, 392)에 석현성(개풍군 배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관미성(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4년에는 수곡성(지금의 신계)에서, 5년에는 패수(지금의 예성강)에서 침공해 온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의 접경 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였다. 6년에는 한강 너머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략하여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였다. 9년에는 고구려와 우호 관계에 있는 신라를 백제가 왜를 앞세워 공격하자 모두 궤멸시켰고, 1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6성을 치고 백제를 응징하였다. 이어 20년에는 동예를 통합하고, 신라와는 하슬라를 경계로 삼았다. 아울러 서방으로의 진출도 꾀하였는데, 모용씨의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10년에는 후연왕 모용성이 소자하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 오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요동성(지금의 요양)을 비롯한 요하 동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15~16년에는 후연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과 목저성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17년에는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과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끝으로 20년에는 동부여를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세력권을 확장하여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영안,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이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는 신묘년 기사이다. 그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문장 전체의 주어를 '왜'로 보아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 가야(?),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4세기 후반의 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가 기정 사실화된다. 이 같은 내용을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이용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앞부분의 주어는 '왜'로 뒷부분의 주어는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또는 왜)를 격파하고……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1972년 이진희에 의해 비문 변조설이 제기되어 상당한 파문이 일어났다. 이진희 씨는 여러 탑본, 사진, 해독문을 대조해 보고, 당시의 정황들을 조사한 결과, 일본 육군 참모 본부가 전후 3회에 걸쳐 비에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가공하여 일본 역사에 유리한 내용이 되도록 변조하였으며, 특히 신묘년 기사에는 상당한 조작이 가해졌다고 결론지었다.
  그 후, 비문 변조설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1984년 중국의 왕지엔친은 비문 변조설과 임나일본부설을 모두 비판하여 논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그는 현지 조사 결과, 비문 변조설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나타나고, 또한 광개토 대왕릉비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임나일본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물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 · 중 · 일 삼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고 있다. 판독이 어려운 글자에 대한 정확한 판독과 변조 여부를 정확히 밝혀내고, 역사상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국제 관계와 각국의 발전 단계를 염두에 두고, 관련된 기록과 유물에 대한 엄밀한 검증을 거친 다음, 관계 학자들의 직접적인 공동 조사를 통한 연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