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과 남북국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은 옛 고구려 땅에 9도독부와 42주, 100현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하였지만, 고구려 유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당은 이러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처음에는 무력을 사용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요동 및 만주 지역의 저항 세력을 영주[지금의 조양]로 강제 이주시켜 감시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저항 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급기야 696년에는 거란 장수 이진충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이민족에 대한 당의 감시망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영주로 이주되어 감시를 받고 있던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이진충의 난을 계기로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말갈인을 이끈 걸사비우와 함께 영주를 탈출하였다. 대조영은 당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면서 걸사비우 휘하의 말갈인들을 규합하여 전열을 보강하였다. 그는 당군의 공격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모란강 상류의 동모산 지역에서 698년에 진국을 세웠다. 당시 동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당에 대한 저항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의 세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자연히 대조영이 세운 진국을 중심으로 급속히 통합되어 갔다. 이에 당도 진국을 현실적인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713년에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는 유화책을 썼다. 대조영 집단은 원래 속말 말갈인으로서 원거주지인 속말수 유역에 거주하다가, 6세기 말 전후에 고구려 안으로 옮겨 와 정착하면서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의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즉 대조영은 이미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어 스스로 고구려에 대한 귀속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강하게 표방하였다.
  발해가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다고 한다면,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이런 면에서 발해와 신라의 공존 시대를 상정하고, 이를 '남북국 시대'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1784년(정조 8)에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남북사'의 용어를 쓰면서 제기되었고, 1864년(고종 1)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씀으로써 그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신라인들은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신라의 삼국 통일의 의미와도 결부된 문제여서 그 이후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일제 시대에 단재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외세인 당군을 끌어들여 동족 국가인 백제를 통합하는 데 그친 것으로 악평하였던 반면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건국을 크게 호평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대립과 반목을 지양하고 하나의 민족 국가로 발전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의도 부정할 수 없으므로, 그 역사적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런 면에서 삼국 통일과 발해 건국의 의미를 한국사 체계 속에서 어떻게 조화 있게 이해할 것인가가 앞으로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