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 논쟁
 
  17세기 말에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에서는 심성론에 관한 관심을 다시 기울이면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논쟁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이 학파 내부에서 이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호락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초 이이 학파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권상하의 문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계기가 되어 호락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원진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하고 이간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스승인 권상하가 인물성이론을 지지함으로써 충청도 지방의 노론은 인물성이론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노론인 김창흡 · 박필주 · 이재 등은 이간이 주장한 인물성동론에 동조하였다. 충청 지역의 인물성이론(이를 호론이라고 함)과 서울 · 경기 지역의 인물성동론(이를 낙론이라고 함)의 논쟁은 이후 100여 년 동안이나 전개되었는데 이를 호락 논쟁이라고 한다.
  충청 지역의 호론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성인과 범인, 사람과 짐승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신분 제도와 지주 전호제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낙론은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성장하고 있던 일반민의 실체를 현실로 인정하고 노비 · 서얼의 문제에서도 개혁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후에 호론은 위정 척사 사상으로, 낙론은 북학 사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