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자료



1. 고대 사회

석기시대의 평등하였던 원시사회는 청동기를 사용함에 따라 빈부의 차가 나타나 지배ㆍ피지배의 관계가 생기고, 여기서 최초의 계급사회인 군장사회가 출현하였으나 이들 군장사회는 아직도 지배기구를 제대로 갖춘 국가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군장사회 중에는 이미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국가형태를 이룬 곳도 있기는 하였지만 역시 대부분의 군장사회는 철기를 사용하게 된 후에 초기국가의 단계로 넘어갔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각지에서 우세한 군장사회가 주위의 여러 소국을 병합하며 몇 개의 초기국가가 성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선진지역인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가 먼저 국가형태를 이루었고, 옥저ㆍ동예ㆍ삼한 등 후진지역에서는 오랫동안 군장사회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점차 그 내부에서 중심세력이 대두하여 삼한지역에서는 마침내 백제국(伯濟國)과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백제(百濟)ㆍ신라(新羅)의 국가가 각각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조선은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됨으로써 결국 고구려ㆍ백제ㆍ신라만이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하였다. 고대국가는 초기국가의 발전된 형태로 독립적인 대가(大加)들이 중앙관료의 지위로 떨어지고 미약하였던 국왕권이 강화되어 보다 조직화된 정치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ㆍ백제ㆍ신라는 내부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상호간의 싸움을 전개하였다. 처음 삼국항쟁의 주도권은 중국세력과의 싸움을 통하여 국력을 축적한 고구려가 잡았지만 결국 착실한 국력신장을 이룩하고 대중국외교에 성공한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붕괴시켜 삼국통일을 성취하였다. 이 삼국통일은 하나의 민족국가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고, 보다 차원 높은 민족문화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 영토가 대동강과 원산 이남에 그쳐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 지방을 상실하였다는 점에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만주지방에는 곧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건국함으로써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가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단, 신라와 발해는 서로 교통하지 않고,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한국민족의 역사에서 이탈하여 신라만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지만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발해의 유민을 포섭 흡수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이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신분

법적 지도나 사회적 통념에 의해 결정되는 개인의 지위나 자격으로 전통사회의 사회적 불평등을 표현하는 개념. 사회적 불평등을 표현하는 개념은 신분 외에 계층과 계급 등이 있으나, 전통사회의 불평등은 대개 법적 제도로 규정되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러한 법적 제도는 신분에 따라서 개인의 정치적 출세는 물론 사회적 지위와 세세한 일상의 생활양식까지 강제로 규제하였다. 신분과 신분제도는 바로 국가권력에 의하여 결정, 창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지배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지배층의 권력은 근원적으로 경제력에 있었다. 따라서 신분이란 전통사회 계급의 법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전통사회는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신분제도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현상을 동양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질적인 신분제도와 신분구조가 존재하였다. 예컨대 서구의 중세사회는 귀족제가 그 신분제의 특징이나, 동양의 경우는 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도의 경우는 종교적 제도에 의하여 신분이 규정되는 카스트가 있고,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반상제도가 존재하였다.
  신분이 형성되는 요인은 시대와 사회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신분의 발생설은 재산의 차이가 계급을 발생케 하였다는 사유 재산설, 힘이 있는 대씨족이 약소 씨족을 정복한 결과로 생겼다는 정복설, 자본·자연·노동의 분배에 의한 산물이라는 경제 원동력설, 분업의 산물이라는 분업설, 권력 분배의 산물이라는 권력설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복설은 원시 또는 고대 사회에서 신분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재산설과 경제원동력설은 중세 후에, 분업설은 현대사회의 주요한 신분결정의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 전통 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자기신분의 보호를 위한 신분내혼제와 신분 세습제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신분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신분구조의 상층은 부족사회에서는 족장제가 전형적인 형태이고, 고대국가 형성기에 처음 등장한 귀족제는 고려 중기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말기에 뚜렷하게 나타난 관료제는 조선 말기까지 강력히 유지되었으며, 동시에 양반사회를 형성하였다. 양반사회 구조의 특징은 관료를 충원하는 양반과 중인, 그리고 생산에 종사하는 양인과 노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자가 전통사회의 소수의 지배 신분을 형성하였고, 후자는 다수의 피지배 신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분의 역계층화 현상이 나타났다. 비록 구조적으로 역계층화 현상이 일어나고 신분제도가 없어지지만, 전통적 신분의식은 일제 강점기까지 통혼과 행동 양식에 강력히 잔존하였다.

 


3. 진대법

건국 이후 고구려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태조왕 때 본격화된 대외 정복 활동은 고구려사회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로 인해 지배 집단의 경제력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 러나 이는 고구려 사회의 계층 분화를 더욱 촉진시켜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빈민으로 몰락해가는 사회 문제를 낳았다. 귀족들은 농민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많은 노비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됐다. 그들은 봄철에 배고파 굶주리는 농민에게 비싼 이자를 조건으로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이를 갚지 못할 경우 농민의 땅과 재산을 헐값으로 빼앗다시피 매입하거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민일 때에는 그 농민의 자식을 노비로 삼아버렸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민을 보호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몰락을 막아야하는 것이 집권자의 책무이자 도리이다. 더군다나 농민이 귀족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은 농민의 몰락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공민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으며 이는 곧 국가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므로 국가 재정의 안정적 확보 차원에서도 농민의 몰락을 막아야하는 필요성이 제기된다. 즉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왕권 강화와 귀족 견제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진대법은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실시된 춘대추납제도이다. 당시의 기록을 참조해보면 이러한 조치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춘궁기에 지급된 소량의 식량 지급이 과연 백성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이 유망 및 아사 등을 방지함으로서 왕을 비롯한 귀족 특권층의 안정적 유지가 목적이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 민중의 거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귀족 특권층의 부양에 있었다고 할수 있으며 그러한 부양 계급이 몰락한다는 것은 결국 귀족 집단도 안정을 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중앙 재정이 전국의 빈민들을 모두 구제할 정도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이러한 조치는 일련의 민본주의적 상징성에 그 기반을 둔 조치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4. 양직공도를 통해 본 6세기 백제의 생활상

양직공도는 중국 양(梁)나라의 원제(元帝) 소역(蕭繹)이 형주 자사로 있을 때(526~536) 그린 사신도(使臣圖)로 현재 중국의 난징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6세기 전반기 양나라에 파견된 32개국의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한것으로 일부는 소실되고 현재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있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의 서술과 부합되고 있다. 특히 삼국 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에 일찍부터 우리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백제국사(百濟國使)에 관한 부분은 사신도와 7행 160여자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신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은 약간 좌향의 자세로 하여 발을 같은 방향으로 하고 있고 단아한 용모에 관모를 쓰고 겉옷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으며 도포는 청색으로 소매는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였다. 도포의 옷깃과 소매 그리고 바지의 아래 단에는 붉은색의 색동이 돌려있다.
도포 밑에는 통이 넓어 바람이 잘 통하는 개구고(開口袴)라는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흰 비단으로 만든 관모는 두줄의 끈이 귀의 앞과 뒤를 지나 턱밑에서 맨 모습이다. 기록 내용은 백제가 중국과 통교한 내용이 전체의 1/3로서 <양서의 기록과 구성ㆍ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 첫째 “진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라는 기사이다. 이 기록은


<양서> 백제전과 <송서> 백제전에 똑같이 전해지고 있다. 둘째 백제의 전지왕, 비유왕, 동성왕, 무령왕이 차례로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음을 기록하였다. 특히 양직공도에는 당시 도읍지가 ‘고마’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셋 째 백제가 웅진 시대에 22담로(首魯)에 자제子弟)․종족(宗族)을 파견하였다는 기사로서 이는 백제의 지방 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넷째 백제에 부속된 나라로 반파(叛波) 이하 9개국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주로 <일본서기>에 실려 있다. 사라(斯羅) 신라가 백제의속국이었음을 표시한 기록도 있다. 다섯째 백제의 언어와 의복도 언급하고 있는데 백제의 언어와 의복은 대개 고구려와동일하지만 걸을때 팔짱낀 것을 벌리지 않으며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