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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입니다. 고조선을 세우는 모습은 고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일연이 전해준 우리나라 건국 신화의 첫 장면을 살펴볼까요. ▶아득한 옛날 하늘의 왕 환인에게는 아들 환웅이 있었어요. 그런데 환웅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할 뜻을 품고 있었지요. 아들의 뜻을 알게 된 환인은 환웅을 아래 세상으로 내려 보내기로 결심을 하고, 하늘의 왕권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을 환웅에게 주었어요. 환웅은 바람, 구름, 비를 관장하는 신하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인간 사회를 다스렸어요.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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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평양성을 포위하다

313년과 314년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소멸된 이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 동아시아 교역로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고구려와 백제는 경쟁을 하였어요. 낙랑에서 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바닷길은 낙랑군 설치 이후 오랜 기간 활용된 무역로였어요. 낙랑군과 대방군 소멸 이후 그 지역이 모두 바로 고구려의 영역이 된 것은 아니었어요. 고구려 조정은 오랜기간 이 지역을 북중국이나 요동 방면에서 새롭게 망명해온 이들을 활용하여 통치하였어요. 백제는 아직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지배력이 강력하지 못한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을 도모하였어요.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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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요동의 주인이 되다

주몽이 부여에서 나와 졸본에 고구려를 세운 이후 차츰 나라의 기틀을 잡으며 잡아갔어요. 유리왕 때에는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지요. 고구려의 힘이 점점 커져 가면서 이웃 나라들과 외교관계도 맺고 때로는 전쟁도 벌였어요. 북서쪽으로는 중국 대륙에 있던 여러 나라들과 충돌하였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경쟁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342년에는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전연이란 나라가 고구려를 기습 공격하였어요. 전연의 군대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궁궐을 불태우고 왕의 어머니와 왕비, 그리고 5만 명의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갔어요.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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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아리수를 건너다

사방으로 영토를 넓혔던 광개토대왕을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된 장수왕은 즉위한 지 15년째 되던 해에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정을 하였어요. 수도를 국내성(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것이지요. 내륙 깊숙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던 국내성은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평야가 적고 다른 나라와 교류하기에도 불편했어요. 이전보다 더욱 강성해진 고구려는 큰 강과 평야가 있고, 교류하기에 편리한 도읍지가 필요했던 거지요. 여러 귀족과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장수왕은 대륙의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며 북방을 안정시켰어요.
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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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

신라는 진한의 12개 작은 나라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했어요.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며 점차 국가로 발전해 나갔어요. 사로국이 고대 국가로 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은 지증왕 때였어요. 지증왕은 64세의 나이로 마립간이 되었어요. 즉위하자 지증왕은 왕의 호칭을 지증마립간에서 지증왕으로 바꾸었어요. 신라의 옛 이름인 사로국에서는 ‘왕’이라는 호칭 대신 귀한 사람을 뜻하는 ‘거서간’, 무당 또는 제사장을 뜻하는 ‘차차웅’,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 등 신라 특유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중국식 호칭인 왕으로 바꾼 것이에요. 이것은 중국식 문물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체계가 갖춰진 고대 국가로 발돋움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을 나타내지요.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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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다

한반도 동남쪽의 높은 산맥과 낙동강, 그리고 바다로 둘러싸인 신라는 여러 나라와 교류가 어려워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전이 더디었지요. 그러나 신라는 6세기에 들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잡았어요. 또한 화랑도를 규모가 큰 단체로 만들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지요. 나라를 정비한 신라는 진흥왕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어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백제가 중흥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6세기 무렵 성왕 때였어요. 성왕은 수도를 비좁은 웅진(공주)에서 넓은 벌판인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지요. 그리고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였고,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 주었어요.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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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다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백제의 계속된 공격으로 신라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어요. 게다가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커져 귀족 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겨났지요. 게다가 가뭄과 흉년이 자주 와서 농민의 생활도 이전과는 크게 달랐어요. 성왕의 죽음과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흔들렸던 백제의 국력은 무왕의 노력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어요.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은 회복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가 당으로 가는 바닷길의 관문인 당항성을 공격하였어요.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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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황산벌의 5천결사대를 넘어서다

백제 의자왕은 즉위 초기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북쪽의 30개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점령하면서 백제 중흥을 이루는 듯 하였어요. 그러나 의자왕은 귀족들을 제외시키고 자신의 아들 41명을 최고 관직에 임명하면서 가까운 사람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지요. 의자왕이 권력을 독점하려하자 귀족 세력이 반발하였어요. 나라의 지도층은 분열되고 의자왕이 향락과 사치 속에 빠져 살자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해졌어요. 성충이나 흥수 같은 충신들이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말리자 이들을 옥에 가두었어요. 이를 본 백성들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 갔지요. 혼자서 백제를 공격할 만한 힘이 없었던 신라는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어요. 김춘추가 지원군을 요청한지 16년 만에 당이 군대를 보내면서 나당 연합군이 만들어졌어요.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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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하다

신라와 당은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백제 영토와 대동강 남쪽의 고구려 땅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했어요. 두 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660년(태종 무열왕 7)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당은 약속과 달리 백제 땅에 관청을 설치하고 자신들이 직접 지배하려 하였어요. 당은 한걸음 더 나아가, 663년(문무왕 3)에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였지요. 이는 신라를 왕이 아닌 당이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당의 조치였어요. 신라는 당의 속셈을 알아채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지요.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피할 수 없는 당과의 전쟁을 준비하였어요. 668년, 고구려가 패망한 뒤 곧바로 고구려의 각지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어요.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 각각 1만이 연합해 요동 지역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신라와 당의 전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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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우다

668년, 나당 연합군에게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였어요. 그러나 고구려 땅 곳곳에서는 고구려 부흥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지요. 눈에 가시 같던 고구려를 점령한 당은 고구려가 다시 나라를 일으킬까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 주민을 당으로 끌고 갔지요. 당은 빈곤하고 약한 자는 남게 하고 당에 저항하는 핵심 세력들은 모두 당으로 끌고 갔어요. 이렇게 끌려간 고구려 유민은 가까이는 요서 지역인 영주에, 멀리는 양쯔강 남쪽의 황무지로 끌려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대조영은 송화강 상류 지역에서 살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멸망하자 많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영주로 끌려왔어요. 당시 영주는 동북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당이 세운 전진기지였어요.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여러 민족이 강제로 끌려와 뒤섞여 살고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 당에 대해 불만과 불신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회만 오면 반란을 일으키고자 마음먹고 있었지요.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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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청해진에 국제무역항을 세우다

9세기 들어 신라는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하였어요. 1백여 년간 10명의 왕들이 교체될 정도로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힘은 커져갔지요. 힘이 커진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백성들을 끊임없이 수탈하였어요. 게다가 가뭄과 지진, 병충해 등 자연 재해도 계속되어 백성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버티며 살았지요. 사회가 혼란스럽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많은 신라인들이 배를 타고 당과 왜로 건너가는 일이 생겨났어요. 바다를 건넌 많은 신라인들은 당의 동쪽 해안을 따라 정착하기 시작했어요. 당에 정착한 많은 신라인들은 주로 선박 제작과 무역에 종사하였어요. 이때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건너간 사람 중에 장보고도 있었어요.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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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고려를 건국하다

통일 후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8세기 말부터 진골 귀족들 사이에 왕위 다툼이 일어나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고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도적의 무리가 도처에서 일어났어요. 혼란한 정국 속에서 지방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뭉쳐 방비하면서 신라로부터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였어요. 이처럼 지방에서 성장한 세력을 호족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출신은 경주에서 내려온 지방 귀족이나 촌주, 군인, 상인, 농민, 도적 등으로 다양하였어요. 호족으로 성장한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사를 보유하였고,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일컬으며 지방을 다스렸지요. 호족 중 대표적인 인물로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있었어요. 이들은 신라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 하였어요.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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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다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북진 정책을 추진했어요. 이에 따라 서경(지금의 평양)을 중요하게 여기고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고 하였지요. 이즈음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북쪽 지역과 중국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어요.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었답니다. 한편 당시 거란은 중국 땅 전부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고려가 중국 편을 들면 거란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하겠지요. 그래서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화해의 손짓을 하게 되지요.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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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귀주에서 거란을 물리치다

고려와의 1차 전쟁을 협상으로 마무리한 거란은 송과 전쟁을 벌였어요. 10여 년 동안의 공방 끝에 거란이 승리하였어요. 송은 해마다 거란에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전쟁은 마무리 되었어요. 송을 제압한 거란은 이제 고려를 넘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거란은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추대한 것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두 번째로 고려를 침입하였어요. 하지만 이 번 전쟁에서 두 나라는 모두 큰 피해만 입고 별 소득 없이 끝났어요. 거란은 고려 국왕 현종이 직접 거란 황제를 알현하는 친조를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 했어요. 하지만, 현종은 이를 강화를 맺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고 병이 있어 친조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강동 6주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거란은 고려의 친조 거부를 핑계로 강동 6주를 취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지요. 물론 고려는 이를 거부했어요.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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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개척하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나고 고려의 서북방 국경은 안정되었어요. 하지만 이번엔 동북방 국경이 말썽이었어요. 동북방에 있던 여진이 점차 세력을 키우더니 고려의 국경을 자주 침범한 것이지요. 그러나 고려와 여진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어요. 여진족은 오래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부족이에요. 시대에 따라 ‘숙신’, ‘말갈’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었지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세웠던 말갈족도 여진의 한 부족이었어요.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었고, 고려도 여진족이 투항해 오면 집과 땅을 주면서 극진히 대접했어요.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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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쌍성총관부를 되찾다

1231년(고종 18) 고려는 또다시 외적의 침입을 받아요. 이번에 쳐들어 온 외적은 몽골이죠.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몽골군에 맞서 저항했지만 계속되는 몽골군의 공격에 고려는 그만 강화를 맺고 말았어요(1259년) 이때부터 고려는 몽골이 중국 땅에 세운 나라인 ‘원’의 간섭을 받게 되요.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고려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요. 원은 고려의 일부 영토 안에 관청(쌍성총관부)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렸어요. 고려의 영토 일부가 원에 빼앗긴 것이죠. 또 고려 국왕도 원에 의해 결정되었고, 왕의 이름도 원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자를 붙여 직접 지어서 주었어요(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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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조선을 건국하다

몽골의 침략을 받고 40여 년간 저항하던 고려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어요. 전쟁에서 진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의 간섭을 받게 되었지요. 원 간섭기 원을 등에 업고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권력자들이 생겨났어요. 이들은 불법으로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대농장을 만들었고,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어 농지를 경작하게 하였지요. 하지만 권문세족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이들의 악행을 막을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노비가 늘고 일반 백성의 수가 줄어들자 나라가 거두는 세금도 줄어들었고, 이에 부족한 재정은 다시 일반 백성들에게 거둬들이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어요.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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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홍산에서 왜구를 물리치다

고려는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고려 말에 들어 왜구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지요. 처음에 이들은 고려 해안가에 불쑥 나타나 식량을 빼앗고 사람들을 잡아가고 물자를 약탈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아예 해안에 상륙해 민가와 관아를 습격하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이 때문에 고을을 내륙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었지요. 심지어 평안도, 함경도 일대까지 왜구로 인한 피해가 컸다고 해요. 당시 왜구들은 도적떼의 수준을 넘어서 상당한 규모와 장비를 갖춘 일종의 군대였지요.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왔다고 하니 당시 왜구의 침입이 얼마나 잦았는지 짐작가지요.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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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화포로 왜구를 무찌르다

고려 후기 원의 간섭에 벗어나 개혁을 추진하던 공민왕의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졌어요. 바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었지요. 홍건적은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었어요. 원의 군대에 밀려 홍건족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란을 가기도 하였어요. 왜구는 일본의 쓰시마 섬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어요.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어요.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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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조선을 건국하였어요.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중심에는 정도전이 있었는데, 그는 임금이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민본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어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났어요.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정안군 이방원은 공신에 책봉되지 못한데다가, 막내였던 이복 동생(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에 불만을 갖게 되었지요. 이방원은 결국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동원하여 정변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지요. 이를 ‘왕자의 난’이라 해요. 이후 이방원은 결국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태종이에요.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자 하였어요.
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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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다

1592년 4월13일, 부산포에 첫 발을 디딘 왜군은 이틀 만에 동래성을 점령하였어요. 그리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6월에는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했어요. 임금은 명과 가까운 의주로 피신을 갔지요. 그러나 왜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어요. 가장 중요한 식량과 군수물자의 보급이 더 이상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남해를 돌아 서해로 진출해 물자를 보급하고자 했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고, 육지에서는 의병들의 기습공격으로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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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조선의 바다를 지켜내다

1592년 4월 일본군 20만이 남해를 건너 조선을 침입해 왔어요. 조선이 건국된 지 200여 년 이래 가장 큰 외침이었지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이틀 만에 함락되었어요. 오랜 평화 시기 속에서 방심하고 있던 조선군은 조총이란 신무기로 무장한 수많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선조 임금은 급히 신립에게 정예 기병 8,000명을 주며 왜적을 막을 것을 지시했지만 충주 탄금대에서 그만 전멸하고 말았어요.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한 달이 되지 않아 한양을, 두 달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였어요. 일본군의 빠른 진격에 놀란 선조는 명과 가까운 압록강변의 의주로 피신하였어요. 일본군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이를 막을 조선군은 없어 보였지요. 그때 멀리 남해에서 조선군의 첫 승전보가 전해집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 온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