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흥(延興) 2년(472, 개로왕(蓋鹵王) 18)에 [백제(百濟)] 왕 여경(餘慶)
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파도에 배를 던져 망망한 바닷길을 더듬게 하였습니다.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만분의 일이나마 조그만 정성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귀신의 감응이 내리고 황제의 위령(威靈)이 크게 감싸주어 폐하의 대궐에 도착하여 신의 뜻이 퍼진다면, 아침에 그 말을 듣고서 저녁에 죽는다 하여도 영원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개로왕
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워 승냥이와 이리들에게 길이 막히니, 비록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으나 번신(藩臣)의 예를 받들 길이 없었습니다. 천자의 궁궐을 그려 우러러보면서 달려가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소슬한 바람이 살며시 일어나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시절의 변화에 잘 조화하시는지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삼가 [제가] 사사로이 관직을 준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
'대방' 관련자료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高句麗)와 함께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선대(先代)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가 이웃 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수(須)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 만에 쇠(釗)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씨(馮氏)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이 [고구려로] 도망하여 온 후로부터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하여져 끝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화(戰禍)가 연이은 것이 30여 년입니다. 물자도 다되고 힘도 떨어져서 자꾸만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천자의 인자와 간절한 긍휼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大臣)과 강족(强族)들의 살육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멸망의 시기이며 도움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또 풍씨 일족의 사람과 말에게는 조축지련(鳥畜之戀)
새와 짐승이 그 주인을 따르는 정
이 있고, 낙랑(樂浪) 등 여러 군(郡)은 수구지심(首丘之心)
자기 근본,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의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굴 언덕으로 향함이 인(仁)이다. (狐死正 丘首仁也)’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위엄을 한번 발동하면 정벌만이 있고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명민하지 못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당연히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르침을 받아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불의와 잘못은 하나뿐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처럼 번병(藩屛)
변방의 제후국
의 겸손한 말을 지껄이면서도1)
1)
겉으로는 제후를 자처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다. 외효(隗囂)는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王莽)이 신(新)을 세운 이후 중국 땅을 할거한 군웅 중의 한 명이다. 황실 종친 유수는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후한 광무제가 된 후 지방에 할거하던 반란 세력을 하나씩 토벌하고, 마지막으로 서쪽 변방인 농서(隴西)의 외효(隗囂)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만이 남아 있었다. 외효는 광무제 유수와 수교하고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의 호칭을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위협을 느꼈다. 이에 촉의 공손술에게 사신을 보내어 광무제에게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으며, 다시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신하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중신들이 광무제에게 두 세력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광무제는 이미 중원이 평정되었으므로, “이 둘은 문제 삼을 것이 없다[度外視).”라며 거절하였다. 외효는 서기 33년(건무 9년) 병으로 죽고 그 아들 외구순(隗寇恂)이 항복하여 농서는 후한에 복속되었다.
남조의 유송(劉宋)을 지칭
와 통호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
유연(柔然)을 지칭
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王略)을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옛 요(堯)임금과 같이 더 없는 성군(聖君)도 [남만(南蠻)을] 단수(丹水)에서 쳐서 벌하셨고, 맹상군(孟嘗君)처럼 어질다는 사람도 비웃는 길손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씩 새어 나오는 물이라도 마땅히 일찍 막아야 하니, 지금 취하지 않으실 것 같으면 뒷날 후회를 남기실 것입니다. 지난 경진(庚辰)년 이후, 신의 나라 서쪽 국경에 있는 소석산(小石山)의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함과 아울러 옷과 기물⋅안장⋅굴레 등을 얻었사온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깊이 분노를 느낍니다. 옛 [춘추시대] 송(宋)나라에서 신주(申舟)를 살해하자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맨발로 뛰쳐나갔고, 매가 놓아 준 비둘기를 덮치자 신릉군(信陵君)은 끼니를 굶었습니다. 적을 이겨 명예를 세움은 더할 수 없는 훌륭한 것입니다. 구구하게 외진 조그마한 나라에서도 만대(萬代)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운을 모으셨고 형세는 산해를 기울일 만한데, 어찌하여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폐하께 가는 길을 걸터앉아 막게 하십니까? 이제 주운 안장 하나를 올려 증거로 삼으려 합니다.”『위서』권100, 「열전」88, 백제
- 겉으로는 제후를 자처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다. 외효(隗囂)는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王莽)이 신(新)을 세운 이후 중국 땅을 할거한 군웅 중의 한 명이다. 황실 종친 유수는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후한 광무제가 된 후 지방에 할거하던 반란 세력을 하나씩 토벌하고, 마지막으로 서쪽 변방인 농서(隴西)의 외효(隗囂)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만이 남아 있었다. 외효는 광무제 유수와 수교하고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의 호칭을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위협을 느꼈다. 이에 촉의 공손술에게 사신을 보내어 광무제에게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으며, 다시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신하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중신들이 광무제에게 두 세력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광무제는 이미 중원이 평정되었으므로, “이 둘은 문제 삼을 것이 없다[度外視).”라며 거절하였다. 외효는 서기 33년(건무 9년) 병으로 죽고 그 아들 외구순(隗寇恂)이 항복하여 농서는 후한에 복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