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 방향은 좁고 서남 방향은 길어서 천 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아 있다. 호수(戶數)는 5,000호(戶)이다. 대군왕(大君王)은 없으며 읍락(邑落)에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漢)나라 초에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衛滿)
이 조선(朝鮮)의 왕이 되었는데, 이때 옥저(沃沮)의 [여러 읍락이] 모두 [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
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이에] 옥저를 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다. 후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이른바 현도고부(玄菟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위만(衛滿)' 관련자료
'위만' 관련자료
옥저는 다시 낙랑(樂浪)
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어 별도로 영동(領東) 7현(縣)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도] 모두 현이 되었다. 건무(建武) 6년(서기 30)에 변경의 군(郡)을 줄였는데, 동부도위도 이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현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를 모두 각 현의 제후(縣侯]로 삼았으니,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현(不耐濊縣)의 제후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후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공조(功曹)⋅주부(主簿) 등 여러 관서를 두었는데, 예(濊)의 백성(民)이 모두 [관직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 우두머리는 스스로를 삼로(三老)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옛 [한나라] 현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고 큰 나라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낙랑(樂浪)' 관련자료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