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명천황 6년(545)] 이 해에 고구려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피살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2월 갑오(甲午)에 고구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며 전투하였다. 세군은 패하였지만 3일이나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고 세군의 자손은 모조리 잡혀 죽임을 당했다. 무술(戊戌)에 박국향강상왕(狛國香岡上王)이 훙(薨)하였다.】
이 해(546)에 고구려에서 난리가 크게 일어나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인이었다.
【『백제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구려에서는 정월 병오(丙午)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나이가 8세였다. 박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은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 외가(外家)가 추군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외가가 세군이었다. 박왕의 병이 심해지자 추군과 세군이 각자 그 부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고자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세군에서 죽은 자가 2000여 인이었다.】
『일본서기』권19, 「흠명천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