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문제(文帝)] 17년(597) 상(上)
수 문제를 말함
이 탕(湯)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에게 새서(璽書)
옥새(玉璽)를 찍은 문서, 곧 황제의 친서(親書)를 의미
를 내려 말하였다. “짐은 천명을 받아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데, 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위임하고,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각기 그 마음을 이루도록 하였소. [그런데] 왕은 매번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하고 비록 번국(藩國)을 칭하지만, 성의를 다하지는 못하였소. 왕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의 덕과 같이 베풀어야 하거늘 도리어 말갈(靺鞨)을 핍박하고 거란(契丹)을 통제하였소.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의 신하가 되고자 하는데, [왕은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니 어찌 해로움이 크고 깊다고 하지 않겠소?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奏聞)하면 될 것인데, 몇 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소? 이때 [짐은] 사자에게 명하여 왕의 번국을 위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을 살펴보고 그 정치방법[政術]을 가르치고자 해서였소. [하지만] 왕은 [사자를] 객관에 앉혀 두고, 엄히 막아 지키면서 그 눈과 귀를 닫고 막도록 하여 끝내 보고 들을 수 없도록 하였소. 어떠한 음흉함이 있어서 다른 이가 알지 못하도록 하고, 관사(官司)를 통제하며 그가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였소? 또한 [왕은] 자주 기마(騎馬)를 보내 변방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번 간계한 계획을 펼쳐 올바르지 못한 낭설을 만들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수서』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