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또한 칙명(勅命)으로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토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6월 18일에 태종무열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서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太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義慈)의 도성(都城)을 깨뜨리고자 한다.”고 하였다. 법민이 말하기를,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大將軍)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하였다. 소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兵馬)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서 소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자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
【춘(春)을 또는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堦伯)
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士卒)들은 힘이 다하였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기를,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라고 하였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라고 하고, 곧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계백(堦伯)' 관련자료
좌장군(左將軍)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
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관장이 “예!”라고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
에게 끌려갔다. 계백
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야!”라고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
'계백' 관련자료
'계백' 관련자료
관장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 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
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삼군이 그것을 보고 분에 받쳐서 죽을 마음으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
은 죽고,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계백' 관련자료
'계백' 관련자료
'좌평(佐平)' 관련자료
이날에 정방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
【또는 영(永)으로도 썼다.】
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정방이 곧 김문영을 풀어 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서 당나라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좌평' 관련자료
12일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기 위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갔다.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
을 시켜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다. 의자왕의 서자(庶子)가 몸소 좌평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상좌평(上佐平)' 관련자료
'좌평' 관련자료
13일에 의자왕이 좌우의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서 몸을 보전하였다. 의자왕의 아들인 융(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융은 땅에 엎드려서 말이 없었다.
'대좌평(大佐平)' 관련자료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이 항복했음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酒宴)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 및 여러 장수는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당 아래에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 중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좌평' 관련자료
이날 모척(毛尺)을 붙잡아서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하였기 때문에 목을 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서 [죄목을] 헤아리며 말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에서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서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주둔하면서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좌평' 관련자료
26일에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 사비성(泗泌城)에 남아서 지켰는데, 왕자 인태(仁泰)가 사찬(沙湌) 일원(日原), 급찬(級湌)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000명으로써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 2000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이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 적병이 물러가서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서 틈을 엿보아 가며 성읍을 노략질하였는데, 백제 사람들 중에서 배반하여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에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서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勅命)을 전한 후에 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그를 따라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18일에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500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5일에 왕이 계탄(雞灘)을 건너서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는데, 7일에 이겨서 700명의 목을 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서 공을 논하였는데, 계금졸(罽衿卒) 선복(宣服)을 급찬(級湌)으로 삼고, 군사(軍師) 두질(杜迭)을 고간(高干)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 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은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의 직을 맡겼고, 은솔 무수(武守)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대감(大監)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을 맡게 하였다.
'좌평' 관련자료
『삼국사기
'삼국사기'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