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徐熙)
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소손녕(蕭遜寧)의 진영에 가 통역관을 시켜 서로 인사하는 예(禮)를 물었는데, 소손녕이 “나는 대조(大朝)의 귀인(貴人)이라 마땅히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서희
가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에게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법이지만 양국 대신이 서로 보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리오” 하였다. 이렇게 두세 번 말해도 소손녕이 받아들이지 않자, 서희
가 노하여 관사로 돌아와서는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당(堂)에 올라와서 서로 예를 행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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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가 영문(營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함께 뜰에서 서로 읍(揖)하고 당에 올라 예를 행하고는 동서(東西)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
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왔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희
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東京)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또한 우리의 지역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둑질하여 차지하고는 교활하게 대처하고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조빙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쌓고 도로를 만들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의 말을 천자에게 전하면 어찌 가엾이 여겨 흔쾌히 받아들이지 아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는 기운이 매우 강개하므로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사실을 정리하여 아뢰었다. 거란의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해를 청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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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가 거란 군영에 7일이나 머물다 돌아오는데 소손녕이 낙타 10수(首), 말 100필, 양 1000두와 비단 500필을 주니 성종
이 크게 기뻐하여 강나루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곧바로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幣使)를 삼아 (거란) 조정에 들어 보내려 하니 서희
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야 요나라 조정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했으니 강의 바깥쪽을 얻기를 기다린 뒤에 예폐사를 파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성종
이 말하기를, “오래 수빙(修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라며 드디어 사신을 보냈다. (서희
는) 평장사(平章事)에 전보(轉補)되었다. 그는 성종
13년(994)에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두 진(鎭)과 곽주(郭州)⋅구주(龜州) 두 주(州)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에 또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安義)⋅흥화(興化) 두 진(鎭)에 성을 쌓고 또 이듬해에 선주(宣州)⋅맹주(孟州) 두 주(州)에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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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94, 「열전」7 [제신]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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