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니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학교 제도가 크게 갖추어졌고, 진(秦)·한(漢) 이후로도 학교 제도가 비록 순수하지는 못하였으나 학교를 늘 중히 여기었으니, 일시(一時)의 정치 득실이 학교의 흥패에 좌우되었다. 그러한 자취를 오늘날에도 역력히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에 성균관
을 설치하여 공경(公卿)·대부(大夫)의 자제 및 백성 가운데서 준수한 자를 가르치고, 부학교수(部學敎授)를 두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며, 또 이 제도를 확대하여 주·부·군·현에도 모두 향학(鄕學)
을 설치하고 교수와 생도를 두었다. 병률(兵律)·서산(書算)·의약(醫藥)·상역(象譯)
등도 역시 이상과 같이 교수를 두고 때에 맞추어 가르치고 있으니, 그 교육이 또한 지극하다.
'성균관' 관련자료
'향학(鄕學)' 관련자료
'상역(象譯)' 관련자료
『삼봉집』권7, 『조선경국전
'조선경국전'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