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 군수 이황(李滉)
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 번 절하며 관찰사
상공합하(相公閤下)께 글을 올립니다. 저는 몸에 병이 있고 미련하여 맡은바 직무도 제대로 다하지 못하오나 그럼에도 어리석은 정성이 있어 감히 보잘것없는 소견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이 고을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이 있는데, 전 군수 주세붕(周世鵬)
이 창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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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竹溪)의 물이 소백산 아래에서 발원하여 옛날 순흥부(順興府) 가운데로 지나니, 실로 사문(斯文)의 선정(先正)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옛날에 살던 곳으로 마을은 그윽하고 깊으며 구름에 덮인 골짜기가 아늑합니다. 주후(周侯)
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또 죽계가 선현(先賢)의 유적이 있는 곳이므로 그곳에다 터를 잡고 서원
을 지으니, 모두 30여 칸인데 사묘(祠廟)를 두어서 문성공을 봉향(奉享)하고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과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를 배향하였습니다. 당재(堂齋)와 정우(亭宇)를 그 곁에 건립하여 유생들이 노닐고 강독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땅을 파다가 묻혀 있던 동(銅) 몇 근을 얻어 경사자집(經史子集) 수백 권을 사서 소장해 두었습니다. 식미(息米)1)
를 지급하고 섬학전(贍學田)
로 부임하여 묘당에 배알하고 선비들을 예우하며, 더욱 발전시키고 진흥하는 방안에 대한 생각을 극진히 하여 노비
를 충원하고 어염(魚鹽)을 제공하는 등 조처하지 아니함이 없어 길이 힘입도록 하였습니다. 이후로 감사
로 오는 이마다 모두 여기에 뜻을 두어 장려하고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주세붕
는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특히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향교(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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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을 빈민에게 대부해 주었다가 돌려받을 때 이식(利息)을 붙여 받던 쌀이다.
교육기관의 경비 충당을 위해 나라에서 지급한 토지
을 두어 고을의 여러 생원(生員)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고을의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그 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여 학도를 불러 모으니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권장하고 교도함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주후가 군을 떠나자 문성공의 후예인 지금의 판서공(判書公) 안현(安玹)이 마침 도(道)에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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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서원
이란 명칭은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일찍이 남당(南唐)
시대에 이발(李渤)의 은거지인 여산(廬山)의 백록동(白鹿洞)에 학궁(學宮)을 창립하고, 스승과 생도를 두어 가르치며 이를 일러 국상(國庠)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서원
의 유래입니다. 송나라도 이것을 그대로 따랐으나 중엽까지도 성행하지 않아 전국에 다만 네 곳의 서원
이 있었을 뿐입니다. 송나라가 남하한 이후에는 비록 치열한 전쟁으로 어수선한 나날이었는데도 민월(閩越)⋅절강(浙江)⋅호북(湖北)⋅상남(湘南) 지역에 사문이 성하게 일어나 선비들의 학문이 날로 번성하여 서로 사모하고 본받아 곳곳에 증설되었습니다. 오랑캐인 원(元)나라가 중국을 점령하였을 때에도 먼저 태극서원(太極書院)을 건립하여 천하를 창도할 줄 알았습니다. 대명(大明)이 천명을 받음에 이르러 문화가 크게 천명되어 학교의 행정이 더욱 닦이고 고조되었으니, 이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기재된 바를 참고하면 천하에 서원
이 모두 300여 군데나 되며 거기에 기재되지 않은 곳도 많을 것입니다. 무릇 왕궁과 수도로부터 지방의 고을에 이르기까지 서원
이 없는 곳이 없었으니, 서원
에서 취할 이점이 무엇이기에 중국에서 저토록 숭상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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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학
을 강명하고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이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서책을 싸 짊어지고 넓고 한적한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로 도피하여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조용히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 덕을 쌓고 인(仁)을 익혀 이것으로 낙을 삼았기 때문에 기꺼이 서원
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 국학
이나 향교
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곽 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學令)에 구애되고 한편으로 과거(科擧)
등의 일에 유혹되어 생각이 바뀌고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할 때 그 공효를 어찌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선비의 학문이 서원
에서 역량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인재를 얻는 데도 틀림없이 서원
이 국학
이나 향교
보다 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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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밝은 군주는 이런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송나라 태종은 백록동서원에 대하여 강주 지사(江州知事) 주술(周述)의 건의에 따라 구경(九經)을 역마 편에 보내고, 또 그 동주(洞主) 명기(明起)를 발탁하여 썼으며, 그 후 직(直史館)으로 있던 손면(孫冕)이 병으로 조정을 사직하고 백록동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그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이종(理宗)은 유학을 존숭하여 고정서원(考亭書院) 같은 데에 모두 칙령으로 편액(扁額)을 내리어 영광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중국 사풍(士風)의 아름다움이 비단 선비들 스스로 아름답게 한 것일 뿐 아니라 위에서 배양해 준 데서도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 동국의 교도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
과 사학(四學)
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
가 있으니 아름답다 하겠으나, 유독 서원
을 설치하였다는 말만은 아직 들은 적이 없으니, 이는 곧 우리 동방의 큰 결점입니다. 주후가 비로소 서원
을 창건하자 세속에서 자못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겼으나, 주후의 뜻은 더욱 독실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방을 물리치면서 전례에 없던 장한 일을 단행하였으니, 아, 하늘이 아마도 이로 말미암아 우리 동방에 서원
의 교육을 일으켜 중국과 같아지도록 하려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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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가르침이란 반드시 위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도달하게 되어야 그 가르침이 뿌리가 있어서 멀리 오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원이 없는 물처럼 아침에 가득했다가도 저녁이면 다 빠질 것이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인도하는 바는 아래에서 반드시 따를 것이고, 임금이 숭상하는 바는 한 나라가 사모하는 법입니다.
이제 주후가 창건한 것이 비록 진실로 뛰어나고 위대하며 안공(安公)의 이룩해 놓은 바가 또한 매우 완벽하고 빈틈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만 한 군수(郡守)나 한 방백(方伯)
이 한 일일 뿐입니다. 일이 임금의 명령을 거치지 않고 이름이 국사(國史)에 실리지 않았으니 세상의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의구심을 진정시키며 온 나라의 본보기가 되어 영구히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나는 이 고을에 부임한 이래로 서원
의 일에 마음을 다하고자 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미련하고 졸렬하며 무능하고 게다가 파리해지는 병까지 들어 조금도 분발하고 격려하여서 많은 선비를 권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기가 날로 점점 쇠퇴하고 생도들이 점점 게으르고 산만한 지경에 이르니, 옛 현인이 미풍(美風)을 남긴 땅과 우리 동방 사람이 창시하여 드러낸 미덕이 드디어 쇠퇴하고 추락하는 데 이를까 크게 두려워, 망령되이 조정에 아뢰어 만에 하나라도 재가해 주시는 은전(恩典)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리는 멀고 말은 경미하여 감히 두려워 발언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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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생각건대, 합하께서는 관찰사
의 직임을 맡아 교화를 높이는 데 힘쓰시니 무릇 한 지역의 이해관계에 관계된 것도 진달해야 할 텐데, 하물며 이 성세(聖世)의 광대한 계획과 관계되는 것이겠습니까. 혹 합하께서 꼴 베는 사람에게라도 자문하는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고 곧 그 말을 취하여 고치고 다듬어서 임금께 아뢰 주신다면, 곧 송조(宋朝)의 고사에 의거하여 서적을 내려 주시고 편액을 내려 주시며 겸하여 토지와 노비
를 지급하여 재력을 넉넉하게 하시고, 또 감사
와 군수로 하여금 다만 그 진흥하고 배양하는 방법과 공급해 주는 물품만 감독하게 하고 가혹한 법령과 번거로운 조목으로 구속하지 못하게 해 주실 것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군수가 되어서 용렬하고 우둔하며 병들어 쇠약함이 나와 같은 사람은 합하께서 속히 그 직책을 못다 한 죄를 들어서 분명하게 폄직하거나 축출하시고, 조정에 청하여 다른 유신(儒臣) 중에서 덕망과 경술(經術), 절행과 풍모가 사림(士林)
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군수를 삼아서 그 책임을 지우도록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서원
은 비단 한 읍(邑)이나 한 도(道)의 학교에 그치지 않고 한 나라의 학교가 될 것이요, 이렇게 하면 가르침이 임금에게서 근원하여 선비들이 와서 유학하기를 즐거워하여 영구히 후세에 전하여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방에서 기뻐하고 사모하여 다투어 본받아 진실로 선정(先正)의 자취가 남고 향기가 뿌려져 있는 곳, 예를 들어 최충(崔冲)⋅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등이 살던 곳에 모두 서원
을 건립하되 혹은 조정의 명에 의하고 혹 사사로이 건립하여서 책을 읽고 학문을 닦는 곳이 되어 성조(聖朝)의 학문을 존중하는 교화와 태평한 세상의 교육의 융성을 빛내고 드높일 것이요, 이와 같이 하면 장차 우리 동방 문교(文敎)가 크게 밝아져 추로(鄒魯)나 민월(閩越)2)
과 더불어 훌륭함을 나란히 일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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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로(鄒魯)나 민월(閩越) : 추(鄒)는 맹자(孟子), 노(魯)는 공자(孔子)의 출생지며, 민월은 주희(朱熹)의 고향이다.
제가 보건대, 지금 국학
은 원래 현명한 선비가 관여하고 있지만, 저 군(郡)⋅현(縣)의 학교는 한갓 허울만 남았고 가르침이 크게 무너져, 선비들이 도리어 향교
에서 지내는 것을 수치로 여겨 시들고 피폐함이 극심하여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오직 서원
교육이 오늘날 성대하게 일어난다면 무너진 학정(學政)을 구제할 수 있어 학자가 귀의할 바가 있고, 사풍(士風)이 따라서 크게 변혁되고 습속이 날로 아름다워져서 왕의 교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성치(聖治)에 조그마한 도움이 될 뿐이 아닐 것입니다. 하찮은 정성이라도 상께 전달될 수 있다면 병으로 산골에 물러가 죽을지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구구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글을 받들어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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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別紙)
제가 삼가 고사(故事)를 살피건대, 서원
에는 반드시 동주(洞主)나 산장(山長)을 두어 스승을 삼아 그 교육을 관장하니, 이것은 하나의 중대한 일이라 더욱이 거행해야 합니다. 다만 이는 세속을 떠난 선비나 벼슬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 가운데서 선택하되, 그 사람의 재덕(才德) 및 명망과 실상이 반드시 발군(拔群)의 아름다움이 있어 우뚝하게 일세(一世)의 사표(師表)가 될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여 헛되이 그 이름만 차지한다면, 지금 향교
의 교수와 훈도로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어서, 뜻있는 선비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것이니, 도리어 서원
에 피해만 끼칠까 두렵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 감히 이것까지 청하지는 못하나, 이것은 곧 합하께서 재량하여 처리하는 것과 조정에서 가부를 논의하는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저는 또 재배하며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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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문집』권9, 서, 상심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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