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차(淸差)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편전에서 접견할 적에 대신들도 역시 입시하였는데, 거원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바쳤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00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昂邦章)1)
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초10일에 영고탑(寧古塔)
하였다. 거원이 자리를 피하여 절을 하자, 상이 위유하고 이어 차를 하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요?”라고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라고
하였다. 거원이 회답하는 자문을 받기를 청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기를,
“영장(領將)은 어떤 관원으로 정하여 보내야 하겠소?”라고
하니, 거원이 말하기를,
“북도의 변장이나 수령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거원이 물러가자, 태화가 아뢰기를,
“우리 군사가 강을 건넌 뒤에 저들이 만일 군량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군색한 걱정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도로를 계산하여 군량을 싸서 보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북우후(北虞候) 변급(邊岌)이 영장에 적합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00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昂邦章)1)
1)
암바 장긴[amba janggin, 昻邦章京]을 말하는데, ‘암바’는 만주어로 ‘크다’라는 뜻이고 ‘장긴’은 만주어로 ‘장군(將軍)’ 또는 ‘장관(將官)’을 뜻하므로 곧 ‘대장(大將)’ 내지 ‘대장군(大將軍)’이라는 뜻이 된다. 청나라는 팔기제(八旗制) 하의 각급 부대 지휘관을 본래 ‘어전[ejen, 額眞]’이라고 불렀으나, 이후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장군’ 호칭의 한어(漢語) 발음을 그대로 활용하여 ‘지양기윤[jiyang giyun]’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다시 한자로 음역하면서 장긴[章京]이라는 어휘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흑룡강성 해림시 구가향
에 도착하시오.”라고하였다. 거원이 자리를 피하여 절을 하자, 상이 위유하고 이어 차를 하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요?”라고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라고
하였다. 거원이 회답하는 자문을 받기를 청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기를,
“영장(領將)은 어떤 관원으로 정하여 보내야 하겠소?”라고
하니, 거원이 말하기를,
“북도의 변장이나 수령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거원이 물러가자, 태화가 아뢰기를,
“우리 군사가 강을 건넌 뒤에 저들이 만일 군량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군색한 걱정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도로를 계산하여 군량을 싸서 보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북우후(北虞候) 변급(邊岌)이 영장에 적합합니다.”라고
하였다.
『효종실록』 권12, 5년 2월 2일 계해
청차(淸差) 이일선(李一善)이 칙서
를 가지고 왔는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등이 상에게 성문 밖에서 맞이할 것을 권하고, 승지 서원리(徐元履)도 그 말에 적극 찬동하였기에 상이 서교(西郊)에 나아가 맞이하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이일선이 말하기를, “대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羅禪)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라고
하자 일선이 말하기를,
“적병은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들이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내지(內地)의 곡물을 수송하여 군량을 이어대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자면 형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칙서' 관련자료
지금의 러시아
을 토벌하려는데 토벌하려는데, 군량을 지급하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본국에서도 군병을 원조해야 하니, 본국에서 다섯 달 치의 군량을 지참하여 보내 주시오.”라고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라고
하자 일선이 말하기를,
“적병은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들이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내지(內地)의 곡물을 수송하여 군량을 이어대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자면 형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효종실록』권20, 9년 3월 3일 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