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
…(전략)…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16) 가을 내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 획[波]을 끊어 버리고 삐침 획[撇]을 마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 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마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청 인종(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1816년, 순조
'순조' 관련자료
그 다음 해인 정축년(1817년, 순조
17) 여름에 또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순조' 관련자료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
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관련자료
'김정희' 관련자료
또 예자(隷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
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김정희' 관련자료
『완당집』권1, 고, 진흥이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