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적의 정세를 미리 살펴 분명하고 조리 있게 지금의 일을 논할 수는 없으나, 그 대강만을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국론이 두 가지 설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양적과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은 내 나라 사람(國邊人)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하자는 것은 적국 쪽 사람(賊邊人)의 말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옛 문물 제도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를 따르면 금수(禽獸)의 나라가 될 것이니, 이것이 대강의 구분입니다. 타고난 천성을 조금이라도 지닌 자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일인데, 하물며 밝고 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종묘
사직
의 위급한 화가 바로 닥친 가운데 이득을 따져 요행을 바라는 논의가 그 사이를 타고 틈을 엿본다면, 성상께서 과연 토로장군(討虜將軍) 손권(孫權)이 책상을 내리쳤던 용기2)
와 같이 단호하고 강력하게 진압하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종묘' 관련자료
'사직' 관련자료
2)
중국 후한(後漢) 말 삼국 시대 토로장군을 지낸 손권이 조조(曹操)를 치기를 의논할 때 사람들이 모두 조조의 위세를 두려워하였고 일부 대신은 조조를 맞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손권이 칼을 빼어 책상을 자르며 “여러 장수나 관리 중에 조조를 맞이하자고 말하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고사를 말한다.
국변인들의 주장에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싸워 지키자는 설(戰守之說)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도읍지를 떠나자는 설(去豳之說)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싸워 지키는 것은 떳떳한 도리이고 도읍지를 떠나는 것은 임기응변의 방편입니다. 떳떳한 도리는 사람들이 모두 지킬 수 있지만 임기응변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구든지 대개 태왕(太王)과 같은 덕을 지녔다면 가능하지만 태왕과 같은 덕이 없다면 뭇사람의 호응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을 수 없고 대세는 한 번 떠나가면 다시 오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신이 일에 앞서 깊이 염려하는 까닭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혹시 사변이 일어난다 해도 차라리 떳떳한 도리를 지킬지언정 대번에 성인의 일로써 스스로 견주려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만약 싸워 지킨다는 설로 굳게 뜻을 정하여 비록 많은 사람이 가로막고 흔들어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으신다면 귀머거리나 절름발이 같은 사람도 백배의 용기를 낼 것입니다. 하물며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사람이나 초야의 충의로운 사람이면 누군들 백성을 격려하고 권장하여 전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게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속히 애통해 하는 뜻의 교서를 내려 스스로 외적을 들이게 된 것을 반성하고 선후책을 잘 처리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보이시길 바랍니다. 한편의 말이 지극히 간절하여 귀신도 울리고 목석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백성의 마음을 고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 대신을 믿어 체통을 높이고, 삼사(三司)
3)
이 외에 언로(言路)를 넓게 열고, 장수를 뽑고, 군비를 다스리고, 덕망을 지닌 사람들을 최대한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 8도 안에서 각각 본도의 가장 덕망이 높은 자 한 사람을 호소사(號召使)4)
로 삼아 그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높이는 뜻을 보여 주며 영화로운 벼슬과 녹봉
이 그 부관들에게까지 미치도록 하여, 그로 하여금 충효와 절개를 갖춘 인사들을 수습하여 의병
으로 삼아 관군과 서로 호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이 오면 적의 칼날을 꺾고 막아 내어 왕실을 호위하도록 하고, 적이 가면 윤리와 강상(綱常)
을 닦고 밝혀 사교(邪敎)5)
를 잠재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또한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사(三司)' 관련자료
3)
조선 시대 국왕에게 간행⋅탄핵 등을 올려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르던 말. 언론삼사(三司)
라고도 한다.
'언론삼사(三司)' 관련자료
4)
전쟁이 났을 때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던 임시 관직.
'녹봉' 관련자료
'의병' 관련자료
'강상(綱常)' 관련자료
5)
여기서는 천주교를 말한다.
……(하략)……
『화서집』권3, 소차,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
- 『승정원일기』에는 이항로의 상소
'상소' 관련자료'위정척사' 관련자료
- 중국 후한(後漢) 말 삼국 시대 토로장군을 지낸 손권이 조조(曹操)를 치기를 의논할 때 사람들이 모두 조조의 위세를 두려워하였고 일부 대신은 조조를 맞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손권이 칼을 빼어 책상을 자르며 “여러 장수나 관리 중에 조조를 맞이하자고 말하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고사를 말한다.
- 조선 시대 국왕에게 간행⋅탄핵 등을 올려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르던 말. 언론삼사(三司)
'언론삼사(三司)' 관련자료
- 전쟁이 났을 때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던 임시 관직.
- 여기서는 천주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