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주(原州)에 도착하기 전에 이 부근에서 틀림없이 의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주에서 15마일이나 20마일쯤 앞으로 나가면 의병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 정도 거리가 되는 지점에서 양근(陽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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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았을 때 양근은 사람이 살지 않는듯 보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어른이나 아이들이 살그머니 나와 접근해 왔다.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부녀자들은 도망쳐 버렸다. 그날 오후 우리는 집 구조가 꽤 좋은 한국 가옥의 마당에 여장을 풀었다. 나의 고용인이 앞쪽 안마당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가 돌연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리고 급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는 몹시 흥분하여 “선생님, 의병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군인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다음 순간 5, 6명의 의병이 마당에 들어와 내 앞에서 정렬하더니 경례를 했다. 그들은 모두 18세에서 26세 정도의 청년들이었다. 영리하게 보이고 용모가 단정한 한 청년은 아직도 한국 정규군의 구식 제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군복 바지를 입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흐느적거리는 낡아빠진 한복을 입고 있었다. 가죽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허리에 손수 만든 무명
탄대(彈帶)를 감고 있었고, 거기에 총알이 반쯤 들어 있었다. 한 사람은 머리에 터키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두건을 감고 있었다.
'무명' 관련자료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총을 보았다. 여섯 사람이 각각 다른 다섯 종류의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제대로 쓸 만한 총이 없었다. 한 사람은 가장 낡은 유형의 화승총으로 알려져 있는, 총구로 탄환을 재는 구식 한국 총을 자랑스럽게 가지고 다녔다. 그 남자의 팔에는 도화선인 화승이 감겨 있었고, 앞쪽에는 화약 주머니와 장전용 탄환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총구로 탄환을 재는 총이 대부분의 의병이 쓰고 있는 무기였다. 총에 화약을 재기 위해 쓰는 꽂을대는 자기 집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총신은 녹슬어 있었다. 총의 가죽 멜빵은 없고 대신 무명
으로 만든 끈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무명' 관련자료
두 번째 남자는 구식 한국군 총을 갖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구식이어서 그 시대 최악의 견본이라고나 할 만한 물건이었다. 세 번째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한 사람은 아주 작은 스포츠용 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귀여워하는 열 살 정도 어린이에게 줄 수 있을 정도로 결코 해를 가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또 한 남자는 기마용 권총을 갖고 소총 탄창을 붙이고 있었다. 세 자루의 총에는 중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 모든 총은 어느 것이나 녹슬어 있고 부식되어 있었다.
설마 이 사람들이 몇 주 동안이나 일본군에 항전할 것을 선언해 온 사람들이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정규군 1개 대대는 이 사람들과 그 전우들을 포위·섬멸하려고 작전 행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중에 세 사람은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오른쪽에 서 있는 영리하게 보이는 젊은이는 분명히 하사관으로서 행동하고 있었고, 그는 자기 전우들에게 군인으로서의 거동을 훈련시키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기에 일곱 번째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무장은 하지 않고 양반
풍의 좋은 옷차림을 한 상류 계급 한국인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위고 햇볕에 타 있었다.
'양반'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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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날 아침의 전투에 참가하고 일본군 앞에서 후퇴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더 유리하게 포진하여 40명으로 200명의 의병을 공격했고, 의병 측은 후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병 측은 일본군 4명을 사살했으며 일본군 측은 단지 의병 2명을 살해하고 3명 정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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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날 전투를 지휘한 장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퍽 젊은 남자였으며 상류층의 한국인으로 통상적으로 입는 길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줄 알면 일본군이 틀림없이 이리로 올 텐데, 야간 공격에 대한 어떤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나요? 보초는 세워 놓았나요? 개울 쪽 도로는 방비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를 위해 감시를 해 주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른 의병군의 조직에 대해 여러 가지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그 대장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실제로 전혀 조직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각각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무리들이 아주 엉성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각지의 부유한 사람들이 기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그가 산재해 있는 한두 사람의 의병에게 은밀히 건네주면 그들이 각각 자기 주위에서 자기편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들의 전도가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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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곳마다 들은 이야기는, 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부상자나 투항자의 전부를 조직적으로 살육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경우가 그랬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개의 경우가 확실히 그러했다. 이 사실은 일본 측의 많은 전투 보고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투 보고서에 적힌 한국인 사상자 수를 보면 부상자나 투항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고 죽은 자의 수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또 한 가지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고 다님과 동시에,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가 있는 자를 다수 사살했다. 한국인들이 나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 줄 때 그들이 마지막에 꼭 하는 말은, 일제 사격을 가한 후 총살대를 지휘하는 일본 장교는 시체에 다가가 칼로 찌르거나 베거나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빙성을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어느 영국인에게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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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