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거듭 당하고 온갖 모함이 일어나 거듭 걸려든 이 일은 바로 함경도의 방곡령
배상금 문제입니다. 처벌을 기다리며 아뢴 것은 옛날에도 있는 일이므로 성상을 번거롭게 함을 무릅쓰고 사건을 대략 진술합니다.
'방곡령' 관련자료
대체로 신이 기축년(1889) 이후로 13년 동안 북번(北藩)
함경도 지방
을 맡기도 하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면서 전적으로 나랏일을 맡아서 일하게 된 것은 모두 우리 황제의 은혜가 크고 폐하께서 돌보아 주신 덕분이므로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그런데 다만 함경도의 배상금 문제로 말한다면, 지난 기축년에 함경도에 기근이 들었는데 황두(黃豆)
로서 팔짱만 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돌연 다시 방곡 금지령을 늦췄습니다. 그러니 방출을 금지시킨 것도 외서이고 금지령을 늦춘 것도 외서입니다.
노란빛이 나는 콩
소출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약장(約章)에 준해서 외서(外署)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에 문의했습니다. 그러자 외서에서는 원산항 감리(監理)에게 공문을 보내 10월 초부터 기한을 정하고 조약대로 방출을 금지토록 하였는데, 저는 함경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관련자료
그런데 갑자기 임진년(1892) 윤6월경에 외서에서는 처음부터 사실을 조사하지도 않고 일본 공사관에 공문서를 보내고는 배상금 지급을 몰래 수락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추후에 기기사사(機器司事) 임응호(任膺鎬)를 파견하여 문서 안의 허위 기록을 조사하라고 일렀지만, 먼저 배상금을 물겠다고 수락하고 후에 조사를 진행한 셈입니다.
막상 임응호가 돌아가자 모호한 문제가 많으므로 의정부
에서 불러다 사유를 묻자 그는 일본 상인의 부탁을 고스란히 따랐다고 대답하였으며, 심지어 뇌물을 받은 사실까지도 드러났습니다. 또다시 외서주사(外署主事) 이계필(李啓弼)을 파견하여 뇌물을 받고 허위 날조한 정황을 다시 조사하였으니 신이 죄 없이 억울하게 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의정부' 관련자료
임응호가 뇌물을 받은 쪽지와 이계필이 조사한 문서가 모두 외서에 있는데도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은 채 이 배상금을 액수대로 갚도록 특별히 허락한 것은 사실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좋게 가지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뿐 애초에 저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원통하게 변상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하였으니 어찌 더없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60만 냥의 돈을 바치는 데에 가옥(家屋)까지 들어갔는데, 이런 일을 한 번 겪은 후에 이미 이를 억울하게 여기는 공론이 있기는 했지만 어언간 13년의 세월이 흘러 자연히 기정사실로 낙착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파견될 때의 여비 출납과 그에 대한 조사는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인 이준상(李濬相)이 설명한 문서에 원래 들어 있는데 올 가을 법부(法部)에서 조사 보고하였고 또 정부에서도 아뢰어 비준을 받았습니다. 신은 그 무렵에 감히 마음에 들어 있는 간절한 생각을 진술하여 명백히 변별해 주시는 비답(批答)을 받아서 온 집안이 감사하였으니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이상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조정의 처분이 있는데도 갑자기 탁지부
에서 차례로 문서를 들여서 아뢰면서 다시 전날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으니, 이것은 모두 앙심을 품고 마구 몰아세우면서 기어이 보복하려는 것이므로 쟁론할 일도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 폐하께서 밝게 살피시어 틀림없이 중병에 걸린 이 늙은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도록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대죄하는 처지에 번거롭게 아뢰니, 황상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측은하고 가엾게 여겨 억울함을 풀어 주는 혜택을 특별히 베푸시어 다시 죄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탁지부' 관련자료
하니, 비답하기를, “명확하게 해명하였으니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고종실록』 권41, 38년(광무 5년) 1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