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미지급으로 인한 인부 대소동
청부업자가 일당을 주지 않아 인부들이 대소동 - 동진 수리 조합에서 사건 발발
12일 오전 8시 전북 태인 동진 수리 조합 나카무라구미[中村組]에서 1만 6,000원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 노동자 수천 명이 소동을 일으켰다. 정읍 경찰들이 급히 현장으로 출동하여 나카무라구미가 배급한 전표(傳票)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임금을 순사 주재소에서 지급하기로 하여 나카무라구미를 보호하였다. 이때 다시 싸움이 일어나 노동자 수명이 중경상을 입고 나카무라구미의 나가토미[永富]는 권총까지 발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싸움은 더욱 커져 수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을 때까지 싸움을 계속할 모양이라는데 태인 각 단체에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태인지국 전보)
사태 험악
경관 속속 도착
사태가 점점 악화되는 형세이므로 전북 경찰부에서 경찰들을 태운 자동차 3대를 급파했다. 또 정읍 경찰서에서 경관 30명을 파견하여 총 70명이 현재 경계 중이라고 한다. (태인지국 전보)
『동아일보』 1927년 7월 15일, 「임금 불급으로 인부 대소동」
조선 방직 3,000여 명의 아가씨를 찾아-(二)
‘돈벌이 좋다’고 그 누가 말하였는가.
수입은 적고 과도한 노동에, 어여쁜 얼굴은 창백해져 갈 뿐
◇ 부산지국 김상기 수기
이리하여 오후 6시 30분부터는 밤을 낮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야근 노동자[夜勤工]와 교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노동자[職工]의 총수를 절반씩 주야로 나누어 1주일마다 낮과 밤을 바꾸어서, 1년 365일 동안 공장의 기계는 1초도 놀리지 않는다.
우렁차게 돌아가는 기계와 날카롭게 휘두르는 감독자의 눈썹 밑에서 100도에 가까운 열기에 먼지가 섞인 공기를 마시며 침침한 공장 속에서 뼈가 아프고 살이 닳도록 일하는 여성 노동자[女工]들은 대개가 16~17세의 아리따운 처녀들과 20세 전후의 젊은 여인들이다. 그 대다수가 각 농촌에서 모집되어 온 사람으로 그 가운데 특히 경북 등지의 사람들이 많다.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떼어 놓고 천 리 타향의 외로운 신세로 “부산 방직이 돈벌이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와 있는 그들의 수입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놀라지 말라! 처음 들어온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에 15~16전이 최고이며, 6~7년을 이 속에서 늙고 시달린 숙련 노동자라고 해야 최고 30~40전이라 하니 이 얼마나 적은 수입인가. 그렇다면 15~16전의 일급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의문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다.
그 적은 수입으로 호구만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사내 기숙사(社內寄宿舍)이다. 그 구조를 보면 6~7첩(疊)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방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고 한 칸에 평균 십 수 명씩을 수용한다. 문간에는 수위가 교대로 근무를 서며 사감의 날카로운 시선은 끊임없이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어서 극히 자유를 제한한다. 그리고 먹는 음식 역시 한 공기(보통 공기만한) 남짓 들어가는 양철 그릇에 보리와 값싼 쌀로 지은 밥(증기로 쪄서)과 김치 쪽이 그들의 정식이다.
그나마 아침은 너무나 이르고 점심은 먹을 시간이 모자라며 저녁은 온종일을 시달려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 적은 양의 밥도 남긴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 기숙사비는 4원 20전이라고 하니 속담에 “석 냥짜리 말[馬]은 이빨도 들어 보지 말라”는 격으로 한 달 4원 20전짜리 생활비이니 그들의 형편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일지라도 일요일 이외에는 외출을 허락하지 않으며, 일요일이라도 상당한 나이와 신용이 있는 여성 노동자가 아니고는 어떤 사정이 있든지 간에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노동시간이 이렇게 길고, 먹는 음식물이 이 모양이니 그들의 영양과 건강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또 1년 365일을 두고 해가 동쪽에서 뜨는지, 서쪽에서 뜨는지도 모르고 쌀과 고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잊어버리게 된 것이 그들의 생활이다. 그러니 그들의 얼굴빛은 마치 중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창백한 빛이 가로질러 있으며 신체는 쇠약해져서 요즘처럼 더운 철에는 간간이 졸도하는 노동자도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뿐이랴? 여기에 더 한층 가련한 사정이 그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겨우 일당 15~16전의 수입으로 한 달 동안 꾸준히 일해도 근무하지 않는 네 번의 공휴일을 빼고 나면 총수입이 불과 4원 내외이다. 더구나 쇠약해져 가는 건강에 불행히 병마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일을 쉬게 되니 수입이 감소하고 치료에 따라 약값이 들어서 안팎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니 자연스레 빚을 지게 됨은 불가피한 사정이다. 또 먹고만 사는 것도 아니고, 입어야만 되는 것인 이상 몇 가지의 의복을 사고 나면 몇 달이 못 가서 연약한 그들의 몸은 부채라는 무거운 짐 덩어리를 짊어지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2일, 「조선방직의 삼천여 아가씨를 찾아(2), 『돈벌이 좋다』고 그 누가 하더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