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이전정치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위만의 망명과 집권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일찍이 참람되게 왕을 칭하였는데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에게 공격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중략)……】

【“부(否)가 죽자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20여 년이 지나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켜 천하가 혼란해지니, 연(燕)⋅제(齊)⋅조(趙)나라의 백성들이 근심과 괴로움에 점차 망명하여 조선의 준왕에게 오니, 준왕은 이에 이들을 나라의 서방에 두었다. 한(漢)나라에 이르러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호복(胡服)을 하고 동쪽의 패수를 건너 가서 준왕에게 투항하였다. 위만은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거주하기를 구하고,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이를 조선의 번병(藩屛)을 삼겠다고 하였다. 준왕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벼슬을 내려 박사(博士)로 삼고 규(圭 : 제후를 봉할 때 사용하던 信印)를 내려주어 백 리의 땅을 봉해 주면서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위만은 망명자의 무리를 꾀어내어 무리가 점차 많아지자, 이에 사람을 보내 준왕에게 거짓으로 알리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10개의 길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宿衛)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라고 전한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

……(中略)……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收1)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1)諸本에는 ‘故’로 되어 있으나 何焯의 주장에 의거하여 ‘收’로 고쳐 잡는다.

이 사료는 위만(衛滿)의 망명과 집권을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도 보이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망명과 집권 과정은 『위략(魏略)』이 좀 더 자세하다.

부왕(否王)과 준왕(準王)이 부자 상속을 통해 왕위를 계승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조선은 진개(秦開)의 침공 이후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교체기를 맞아 혼란이 지속되자 연(燕)⋅제(齊)⋅조(趙)나라의 많은 백성이 고조선으로 이주해 왔고, 위만은 그러한 망명인의 하나였다. 「조선열전」에서는 위만이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부장(副將)이었다고 전한다.

위만은 고조선으로 망명해 박사(博士) 관직을 받고 서방의 변경 100여 리의 땅을 책임졌다. 박사는 진나라에서 처음 설치한 관직이었는데, 고금(古今)의 일에 통달한 학자로서 황제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위만이 받은 ‘박사’ 관직이 반드시 진나라와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준왕이 그를 신임하여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진나라의 박사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지방 변경을 지키며 망명한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다. 한나라의 성립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는 패수(浿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만이 세력을 확장한 지역은 패수 일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의 패수는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요하(遼河) 혹은 청천강(淸川江)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일찍부터 위만의 국적을 두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위만이 중국계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조선이 중국인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여 한국사의 타율성(他律性)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는 위만이 중국계 인물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본래 고조선 사람이었다고 이해하였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올 때 호복(胡服), 즉 오랑캐의 복장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했는데, 「조선열전」에서도 그가 북상투를 하였다는 점을 들어 고조선 출신이란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위만의 국적이나 출신 문제보다 위만 집권 이후 고조선의 국가적 성격을 해명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위만이 집권한 이후에도 국호를 변경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위만의 국적이나 출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고고학 방면의 성과가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 고고 자료가 축적되면서, 위만의 집권 이후에도 고조선의 지배층은 중국계뿐만 아니라 기존의 토착 세력을 포괄하였고, 중국계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며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를 전개하였음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위만조선관계 중국 측 사료에 대한 재검토」, 『부산여대 논문집』8,,김한규,부산여자대학교,1980.
저서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송호정, 푸른역사, 2003.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고조선사연구』, 이종욱, 일조각, 1993.
『동이전의 문헌적 연구』, 전해종, 일조각, 1980.
『고조선⋅고구려사 연구』, 조법종, 신서원, 2006.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천관우, 일조각, 1989.
편저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0.
『한국사 시민강좌』2, 이기백 외, 일조각,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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