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이전정치여러 나라의 발전

동예의 책화

예(濊)나라의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시하였으며, 산천마다 각각 읍락(邑落)의 구분이 있어 함부로 서로 건너거나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략)…… 그 나라의 읍락은 서로 침범하면 항상 생구(生口)⋅우마(牛馬)로 죄를 처벌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이름 하여 ‘책화(責禍)’라고 하였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中略)……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예(濊)는 동해안 지역에 자리한 세력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종족 명칭인 예족(濊族)과 구분해 흔히 동예(東濊)라고 부른다. 동예는 옥저(沃沮)처럼 주변 여러 세력의 통제를 받아 내부적으로 강력한 정치 권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료에 보이는 동예 사회의 모습도 여러 읍락이 서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엄밀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산천(山川)은 수렵과 채집 및 어로 활동의 중요한 터전이었다. 그러므로 이를 구분해 서로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제 활동의 단위가 읍락으로 제한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읍락 내부의 결속과 유대는 강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읍락이 점유한 산천은 소수의 읍락민이 독점 내지 과점하기보다 다수의 읍락민이 공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공동체적 생산 양식으로 생각되는데, 흔히 이러한 동예 사회의 풍속은 원시 사회의 유산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삼한 시대의 읍락과 사회』, 문창로, 신서원, 2000.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편저
「동예의 사회와 문화」, 이현혜,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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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呂)자형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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