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이전정치여러 나라의 발전

옥저의 부세와 그 부담

(동옥저는) 나라가 작아 큰 나라와의 사이에서 압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고구려는 다시 그 나라의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사자(使者)로 삼아 일을 이끌어 가도록 했다. 또한 고구려의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동옥저의 맥포(貊布)⋅어염(魚鹽) 및 해중 식물(海中食物) 등을 천리 길을 지어 날랐다. 또한 동옥저의 미녀를 보내도록 하여 고구려인의 종이나 첩으로 삼았는데, 그들을 노복(奴僕)과 같이 대우하였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中略)…… 使相主領. 又使大加, ……(中略)…… 統責其租稅. 貊布⋅魚⋅鹽 ……(中略)…… 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 ……(中略)…… 以爲婢妾, 遇之如奴僕.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이 사료는 고구려에 예속된 동옥저(東沃沮)의 정치⋅경제 생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옥저는 현재의 함흥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에 자리했는데, 내부적으로 강력한 정치 권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이 사료에서 보듯 3세기 무렵까지 주변 여러 세력의 압박을 받았다. 옥저는 처음에는 고조선에 예속되었지만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기원전 107년에는 현도군(玄菟郡)에,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고구려에 의하여 요동 방면으로 쫓겨나자 동예(東濊)와 함께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였다고 한다. 그 뒤 56년 무렵 고구려가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옥저 지역의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그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하였다.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지배 방식을 취한 것이다. 다만 그 조세는 고구려의 대가(大加)가 직접 책임지도록 하였는데, 그 부담이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이전」의 찬자는 이러한 조세 부담과 미녀 수탈을 근거로 피수탈자인 옥저민이 마치 노복(奴僕)과 같았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옥저민은 일종의 집단 예민(集團隷民)과 같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한군현(漢郡縣)⋅고구려로 이어지는 주변 세력의 지배와 수탈은 옥저 사회의 내적 성장과 발전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동이전의 문헌적 연구』, 전해종, 일조각, 1980.
편저
「옥저의 사회와 문화」, 이현혜,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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