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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소도와 천군

[삼한(三韓)에서는] 귀신을 믿는다. 국읍(國邑)에 각기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고 부른다. 또한 여러 국(國)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람은 모두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이 사료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일부로, 삼한의 신앙인 제천(祭天)과 소도(蘇塗)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삼한에는 각기 수십 개의 국(國)이 존재하였다. 마한(馬韓)은 54개국,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은 각각 12개국이었다고 한다. 각각의 국은 여러 읍락(邑落)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심이 되는 국읍(國邑)이 있고, 그에 속한 별읍(別邑)이 있었다. 이 사료는 이러한 국읍과 읍락의 신앙을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국읍에서는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렸고 읍락에는 소도가 있었다고 한다.

삼한의 국읍에서 지내는 천신 제사는 고구려와 부여의 제천 의례와 비교된다. 고구려와 부여는 국왕을 중심으로 왕실의 혈통을 천손(天孫)으로 여기면서, 국가와 사회의 통합을 위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제천 의례를 거행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나 부여와 달리 삼한은 여러 국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천신에 대한 제사도 각 국읍 마다 따로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의 천신 제사는 고구려나 부여의 경우처럼 국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사회의 신앙적 통합을 지향하는 의례가 되지 못했고, 신앙의 범위도 국읍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삼한의 별읍에서 소도 신앙을 가졌다고 한 사실이 주목된다. 『삼국지』에서는 소도를 불교의 부도(浮屠), 즉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탑과 비교하였는데,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북과 방울을 매달아 신을 섬겼다고 하였다. 이때 북과 방울은 샤먼이 신앙 행위를 할 때 사용하였던 신물(神物)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소도 신앙은 샤머니즘의 일종이었다고 생각된다. 소도는 일종의 신성(神聖)한 공간으로, 소도의 샤머니즘은 지역적인 독자성을 가졌다. 이 사료에 보이듯 다른 지역에서 소도로 도망쳐 오면 비록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소도에서 모시는 신앙 대상이 지역의 토착 신(神)으로서 국읍이나 다른 읍락의 신앙 대상과 구분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처럼 삼한의 각국은 국읍과 별읍의 신앙에 차이가 있었다. 이 점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제천 의례와 구분되는데, 국읍과 별읍의 신앙 대상은 지역의 토착 신이었다. 다만 국읍의 신앙 대상이 별읍과 다르게 천신이었고, 그 제사를 천군(天君)이 주관하였다고 한 사실은, 삼한 사회의 신앙이 국읍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간 일면을 반영한다. 이후 백제국(伯濟國)이나 사로국(斯盧國)처럼 삼한의 중심적인 국읍이 주변의 여러 국읍과 읍락을 통합해 가면서, 그 신앙 역시 중심 국읍의 천신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나갔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김두진, 일조각, 1999.
편저
「삼한의 정치와 사회」, 이현혜,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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