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고구려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소수림왕] 2년(372) 여름 6월,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회사(廻謝)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시켰다.

3년(373),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4년(374), 승려 아도(阿道)가 왔다.

5년(375)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順道)를 두었으며, 또한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고 아도를 두니, 이것이 해동(海東) 불법(佛法)의 시초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3⋅4⋅5년

二年, 夏六月, 秦王符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迴謝, 以貢方物.

立大2)學, 敎育子弟.

三年, 始頒律令.

四年, 僧阿道来.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小獸林王 2⋅3⋅4⋅5年

2)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이 사료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대 불교의 수용과 태학(太學) 설치, 그리고 율령(律令)의 반포에 대해 전하고 있다. 소수림왕 이전의 고구려는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4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인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지향해 나갔지만 제도의 정비가 수반되지 못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그 한계가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은 서방의 전연(前燕)과 남방의 백제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심지어 국왕 자신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다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이 사료에 보이는 일련의 조치가 바로 이를 목적으로 하였다고 이해된다.

먼저 불교 수용이 주목된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동진(東晋)의 승려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구려의 한 도인(道人)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늦어도 4세기 전반부터 불교를 접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는 일찍부터 낙랑(樂浪)대방(帶方)과 교류하였을 뿐 아니라 314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불교 전래 시점은 4세기보다 이른 시기로 올라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만, 이 사료에 보이는 불교 수용은 국가의 공인(公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의 불교 전래와는 구분된다.

소수림왕 대에 고구려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할 정도로 국가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고구려가 불교를 수용한 의미는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단 고구려뿐이 아니라 한국 고대 여러 나라의 불교 수용은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불교 수용 이전까지 고대의 종교와 신앙은 주로 샤머니즘이었으나, 이는 지역적 특색이 강해서 국가의 사상적 구심점으로 기능하기가 어려웠다. 고구려가 수용한 전진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국왕 중심의 정치 이념과 부합하였다. 따라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추구한 소수림왕의 정치적 목적과 통하는 면이 있었기에 귀족 세력보다 국왕이 앞장섰던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고구려로 수용된 이후 불교가 줄곧 국왕의 정치 이념만 수식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의 업(業)⋅윤회(輪回) 사상은 신분제 질서를 합리화 하는 면이 있었다. 불교에서는 현세(現世)의 사회적 지위가 전세(前世)의 업으로 설명되었고, 현세에서의 괴로움이 내세(來世)를 통해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국왕 중심의 정치 이념을 수식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귀족 세력의 환영을 받았다. 그 결과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불교는 귀족 세력의 신앙으로 정착하며 지배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다음으로 태학이 주목된다. 태학은 유교의 교육기관이다. 고대의 유교 사상은 주로 충⋅효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지향하였다. 그러므로 태학의 설립과 교육을 통해 유교적 인재를 배출함으로써 왕권을 지지하는 관료 집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유교 교육은 이념적으로만 아니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구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율령은 중국에서 성립, 발전한 성문법의 일종으로 각종 관료 규정과 공적 업무의 처리 절차, 조세 제도와 의례를 비롯한 정치 운영과 사회생활 전반을 국가가 수립한 기준과 원리 속에 규정한 것이다. 이에 율령의 반포는 국가 운영의 제도적 장치가 완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소수림왕 대 불교의 수용과 태학의 설립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이유도 여기서 찾아진다. 따라서 불교의 수용과 태학의 설립, 그리고 율령의 반포는 서로 다른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고 또한 그 직접적인 목적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국가 체제의 제도적 정비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구려율령에 관한 일시론」,『동방학지』21,노중국,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세대학교 출판부,1979.
저서
『고구려 전기 정치사 연구』, 금경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4.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96.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김영사, 2005.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고구려 불교사 연구』, 정선여, 서경문화사, 2007.
편저
「체제정비」, 김현숙, 국사편찬위원회, 1996.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