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고구려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한강 유역 상실과 수복 의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이 즉위하자 온달(溫達)이 아뢰었다. “생각하건대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아, 백성들이 가슴 아파하고 원망스러워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못나다 생각하지 마시고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출전에 즈음하여 맹세하며 말하기를, “계립현(鷄立峴)⋅죽령(竹嶺)의 서쪽 지역을 우리나라로 되돌려 놓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출전하여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투하였는데,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쓰려져 죽었다. (온달의)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지만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公主)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음과 삶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시지요.”라고 말하자 드디어 관을 들어서 장례를 지낼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했다.

삼국사기』권45, 「열전」5 온달전

王即位, 温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徃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1)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㳏矣, 於乎歸矣, 遂舉而窆. 大王聞之悲慟.

『三國史記』卷45, 「列傳」5 溫達傳

1)성암본에는 踣로 되어 있다.

이 사료는 온달 장군에 관한 내용이다.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은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平岡公主)의 결혼으로 유명하지만, 설화적인 색채가 강하여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달이 군공을 세워 출세하고 신라로부터 상실한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출정했다는 내용만큼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551년(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 신라 진흥왕 12년)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뒤 이를 수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온달의 출정은 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온달은 이 지역을 되찾지 못하면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사하였다고 한다.

온달전의 내용은 한강 유역을 포함한 고구려가 상실한 죽령(竹嶺)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려 했던 그의 집념이 얼마큼 컸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는 비단 온달 개인의 의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배층 대부분은 한강 유역의 전략⋅경제적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수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642년(신라 선덕여왕 11년) 김춘추(金春秋, ?~661)가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하고자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년)과 면담하였을 때에도 동맹의 전제 조건은 죽령 서북 영토의 반환이었다. 고구려는 7세기 중반까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죽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구려 평양천도의 동기」,『한국문화』3,서영대,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1981.
저서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김영사, 2005.
『한국고대사의 연구』, 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편저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2)』, 김현구 외, 일지사, 200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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