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백제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백제 고이왕의 체제 정비

(고이왕(古爾王)) 27년(260) 봄 정월,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왕명의 출납 일을 맡도록 하고, 내두좌평(內頭佐平)을 두어 창고와 재정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을 두어 예법과 의례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을 두어 숙위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을 두어 형벌과 감옥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도록 하였다.

또한 달솔(達率)⋅은솔(恩率)⋅덕솔(德率)⋅한솔(扞率)⋅나솔(奈率)⋅장덕(將德)⋅시덕(施德)⋅고덕(固德)⋅계덕(季德)⋅대덕(對德)⋅문독(文督)⋅무독(武督)⋅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에 6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은화(銀花)로 관(冠)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왕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27년

二十七年春正月, 置内臣佐平掌宣納事, 内頭佐平掌庫藏事, 内法佐平掌禮儀事, 衛士佐平掌宿衛兵事, 朝廷佐平掌刑獄事, 兵官佐平掌外兵馬事. 又置逹率⋅恩率⋅德率⋅扞率⋅奈率, 及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文督⋅武督⋅佐軍⋅振武⋅克虞. 六佐平並一品, 逹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扞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二月, 下令, 六品已上服紫, 以銀花餙冠, 十一品已上服緋, 十六品已上服青.

三月, 以王弟優壽爲内臣佐平.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古爾王 27年

이 사료는 백제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 대에 이루어진 체제의 정비에 대해 전하는 자료이다. 고이왕은 사반왕(沙伴王, 재위 234)을 폐위하고 즉위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백제 왕실 내에서 지배 세력의 교체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현재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고이왕은 즉위 후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한 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일련의 집권 과정에서 확인된다.

먼저 『삼국사기』 고이왕 7년(240)조에 보이는 좌장(左將) 설치 기사다. 좌장은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관장하였는데 고이왕은 이러한 좌장의 설치를 계기로 기존에 우보(右輔)에게 집중되었던 병권을 왕권 아래 집중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보의 종신적 성격을 제한하여 왕권을 보다 확대하는 한편, 242년(고이왕 9년)에는 남택(南澤)을 논으로 개발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 노력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애썼다.

260년(고이왕 27년)에는 중앙 관부 조직으로 6좌평(佐平)의 역할을 정하는 한편, 중앙 관직을 16품의 관등으로 정비하고 관등의 고하에 따라 관리의 복색을 정하였다. 중앙의 관등 체계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신분 제도가 정비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에 따른 복색의 구분은 관리들의 신분 질서가 구체적으로 갖추어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6좌평16관등제가 고이왕 대에 정비된 것이 아니라, 사비 시대 이후에 완비된 것을 고이왕 대에 부회(府會)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32)조에 17관등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이는 실제 17관등 전체가 아닌 관등제의 기원이 되는 특정 관등을 설치했다는 기사이다. 나머지는 율령 반포 이전의 후대 사실이 소급된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고이왕 대에 이루어진 좌평과 관등제의 정비는 실제로 이 시기에 완비된 것이 아니라 좌평 및 솔계(率系) 관등 중 일부가 설치되면서 관등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고이왕 대에 관등제 정비와 같은 체제 정비와 관련한 사실이 기록되었을까? 고이왕 대는 백제사에서 실질적으로 고대 국가의 틀을 갖춰 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마한(馬韓)의 한 소국으로 존재했던 백제는 3세기 중엽 중국 한군현(漢郡縣)과의 전투를 이끌고 점차 주변 세력을 병합함으로써 비로소 초기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전하는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 전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즉 대방을 비롯한 한군현과의 대립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백제는 대방군과의 전투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주변 소국을 통합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본기」 온조왕 27년(기원 9)에 백제가 웅천책(雄川柵)을 넘어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도 실제로는 고이왕 대의 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백제는 마한 소국의 일부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면서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고이왕 27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체제 정비 과정은 새롭게 편입된 마한 소국들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고이왕 27년을 기점으로 서술된 일련의 체제 정비 기사는 이미 앞서 말했듯이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고이왕 대에 이러한 기사들이 일괄하여 수록되었다는 것은 백제사에서 고이왕 대가 그만큼 역사적으로 변혁을 꾀했던 시기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는 관계(官階)를 비롯한 일정한 체제 정비가 시작되었을 의미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3세기 마한과 백제국」,『백제연구논총 5-백제의 중앙과 지방』,이현혜,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97.
「백제 초기 관제의 성립과정」,『역사와 현실』70,정동준,한국역사연구회,2008.
저서
『백제정치사연구』, 노중국, 일조각, 1988.
편저
「백제의 기원과 건국」, 김두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2008.
「마한사회의 형성과 백제의 건국」, 문창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편, 2008.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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