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신라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법흥왕의 체제 정비와 금관가야 정복

(법흥왕) 4년(517) 여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7년(520) 봄 정월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만들어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위계를 정하였다.

9년(522) 봄 3월 가야국(加耶國)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11년(524) 가을 9월 왕이 나아가 남쪽 변경의 개척지를 순행하였는데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났다.

18년(531) 봄 3월 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의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으니, 지금(고려)의 재상(宰相)과 같다.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아들은 노종(奴宗)이라 하고, 둘째 아들은 무덕(武德)이라 하고, 막내아들은 무력(武力)이라 하였는데, (이들과) 함께 나라의 재산[國帑]과 보물을 가지고 와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그들을 대우하고 높은 관등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23년(536)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 4⋅7⋅9⋅11⋅18⋅19⋅23년

四年, 夏四月, 始置兵部.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十八年, 春三月, 命有司修理隄防. 夏四月, 拜伊湌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 始於此, 如今之宰相.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二十三年, 始稱年號, 云建元元年.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法興王 4⋅7⋅9⋅11⋅18⋅19⋅23年

이 사료는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실시한 율령(律令) 반포와 관제 신설, 연호 사용 등을 보여 준다. 『삼국유사』의 신라사 시기 구분에는 법흥왕 대부터 중고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연이 이처럼 법흥왕 대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것은 이와 같이 당시에 이루어진 일련의 체제를 중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법흥왕은 517년에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를 설치하는 한편, 531년에는 상대등(上大等)을 신설하였다. 병부는 문헌 자료에 나타난 최초의 신라 관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 대에 이르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기사가 사료에 자주 나타난다. 대규모 병력 동원은 전국적인 규모로 군사 제도가 정비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법흥왕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여러 관부 가운데서도 병부를 가장 먼저 설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에서는 병부 설치를 계기로 군정(軍政)과 군령(軍令)을 분리시킴으로써 병권(兵權)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이를 왕권 아래에 통속시켰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병부 설치가 전국적인 군사력의 동원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상대등의 설치는 중앙의 귀족 세력과 연관된다.

삼국사기』의 찬자는 상대등이 고려의 재상(宰相)과 같다고 하였는데, 귀족 세력의 대표로서 화백 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이 바로 상대등이었다고 보기도 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이 상대등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상대등의 역할에 대해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상대등의 설치가 중앙 관부의 정비와 더불어 통치 체제의 확립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법흥왕 대의 여러 조치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율령의 반포이다. 율령은 오늘날의 형법에 해당하는 율(律)과 제도에 대한 각종 규정을 담고 있는 영(令)이 합쳐진 것으로, 고대 동아시아 사회를 규정짓는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 일본 학자들은 법흥왕 대에 율령을 시행하였다는 사료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에 524년(법흥왕 11년)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가 발견되고, 이 비문에 ‘노인법(奴人法)’⋅‘전시왕대교법(前時王大敎法)’ 등의 내용이 확인되면서 법흥왕대 율령이 시행되었음은 분명해졌다. 520년(법흥왕 7년)에 반포하였다는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체계는 알 수 없고, 그것이 어느 나라 율령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단지 율령의 반포와 더불어 처음으로 관리의 공복(公服)을 만들고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위계를 정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적어도 공복제(公服制)가 율령 속에 담겨 있었음을 짐작하는 정도이다.

한편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522년(법흥왕 9년) 가야국(加耶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거나 524년(법흥왕 11년) 법흥왕이 남쪽 변경 개척지를 순행하고 있을 때 가야국의 왕이 찾아왔다는 사료가 이를 말해 준다. 이미 법흥왕 대에 이르면 양국 간의 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신라가 우위를 점하는데, 신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관가야(金官加倻) 김구해(金仇亥)는 마침내 532년(법흥왕 19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사료에는 김구해에게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고 하지만, 『삼국유사』권2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그의 동생인 탈지(脫知)에게 김해의 실질적 지배를 맡겼다고 전한다. 즉 법흥왕은 항복해 온 금관가야의 왕에게 본국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마치 우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김구해 일가를 경주로 이주시켜 금관가야를 완전히 해체시킴으로써 혹시나 일어나지도 모를 반란의 불씨를 애초에 제거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법흥왕은 안으로는 관제를 신설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금관가야를 복속시키는 등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와 같은 법흥왕의 자신감은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으로 이어졌다. 연호의 사용은 대내적으로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었음을 공표하는 기념비적 조치이자, 대외적으로는 신라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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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족회의와 상대등」,『한국고대사연구』6,이영호,한국고대사학회,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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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신라의 역사』1⋅2, 이종욱, 김영사, 2002.
편저
「귀족국가의 형성과 발전」, 이기동, 이기백⋅이기동 공저, 일조각, 1982.
「신라의 융성」, 이우태,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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