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신라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진덕왕의 관제 정비

(진덕왕) 3년(649) 봄 정월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진덕왕 3년

(진덕왕) 5년(651) 봄 정월에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직접 행차하여 백관(百官)으로부터 신년 인사를 받았다. 하정(賀正)의 예(禮)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진덕왕 5년

(진덕왕 5년) 2월에 품주(稟主)를 고쳐 집사부(執事部)로 하였다. 이어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집사 중시(執事中侍)에 임명하고, 기밀 사무(機密事務)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진덕왕 5년

[眞德王] 三年, 春正月, 始服中朝衣冠.

『三國史記』卷5, 「新羅本紀」5 眞德王 3年

[眞德王] 五年, 春正月朔, 王御朝元殿, 受百官正賀. 賀正之禮始於此.

『三國史記』卷5, 「新羅本紀」5 眞德王 5年

[眞德王 五年] 二月, 改稟主爲執事部. 仍拜波珍湌竹旨爲執事中侍, 以掌機密事務.

『三國史記』卷5, 「新羅本紀」5 眞德王 5年

이 사료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진덕왕(眞德王, 재위 647~654) 대에 이루어진 관제 정비와 관련한 내용을 뽑은 것이다. 진덕왕은 신라 시대 세 명의 여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진덕왕은 재위 기간이 길지 않지만, 즉위 초부터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이 사료에 보이는 것처럼 649년(진덕왕 3)에 중국의 의관 제도를 수용하였고, 하정례(賀正禮)를 시행하였다.

중국의 의관 제도는 당(唐)나라의 복식(服飾)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관복(官服) 제도를 의미한다. 신라에서는 이보다 앞선 520년(법흥왕 7)에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648년(진덕왕 2) 김춘추(金春秋, 603~661)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을 체결하고자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그 결과 이때 중국의 관복 제도를 받아들여 법흥왕 대에 이루어진 공복 제도를 다시 개편한 것이다.

하지만 진덕왕 대의 당나라 관복 제도 수용이 단순히 중국 문화의 일방적인 적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사료에서 관복 제도를 바꾸고 이어 하정례를 수용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하정례 역시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해 신라의 전통적인 신년 의례를 개편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나라의 하정례는 황제를 정점으로 한 국가 체제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한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하정례 수용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질서를 구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고, 관복 제도의 수용도 국왕을 중심으로 한 신료 집단의 위계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사료에서 품주(稟主)집사부(執事部)로 개편한 사실이 주목된다. 본래 품주는 조조(租調), 즉 세금을 관리하는 관부로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일종의 가신적(家臣的) 기구였다. 이후 신라가 성장한 국가의 규모에 맞추어 행정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품주의 각종 재정과 수취 관련 업무는 조부(調府)와 창부(倉部)가 맡게 되었고, 품주는 진덕왕 대 집사부로 개편되었다. 그 결과 집사부는 이제 국가의 기밀 사무(機密事務)를 담당하는 부서로서, 위로는 국왕의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여러 관부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신라가 국가 체제를 국왕을 중심으로 정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역주 삼국사기』3, 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편저
「중앙통치조직」, 주보돈,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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