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신라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

진흥왕의 영토 확장

(진흥왕(眞興王)) 9년(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백제가 구원을 청하자 왕이 장군 주영(朱玲)을 보내 굳센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11년(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그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무장한 군사(甲士) 1000명을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12년(551) ……(중략)……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범하도록 하였는데, 승기를 타고 10개 군(郡)을 빼앗았다.

14년(553) ……(중략)……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무력(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15년(554) ……(중략)…… 백제 왕인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역습하여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인 김무력(金武力)이 주(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을 벌였고,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재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가 승기를 타면서 크게 이겼는데, 좌평(佐平) 4명과 군사 2만 9600명을 죽였고 말은 되돌아 간 것이 없었다.

16년(555) 봄 정월 완산주(完山州)를 비사벌(比斯伐)에 설치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강역을 확장하고 국경을 정하였다. 11월에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는데, 지나온 주군(州郡)에 교(敎)를 내려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고 (해당 지역의) 죄수 중 두 가지 죄(二罪)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 주었다.

17년(556) 가을 7월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沙湌) 성종(成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18년(557)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23년(562) 가을 7월 백제가 변방의 민가를 침략하자 왕이 군사를 내어 그들을 막도록 하였는데,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伽倻)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斯多含)이 그를 보좌하였다. 사다함이 5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9⋅11⋅12⋅14⋅15⋅16⋅17⋅18⋅23년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 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十二年, ……(中略)……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十四年, ……(中略)……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

十五年, ……(中略)……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 復一年租調, 曲赦, 除二罪, 皆原之.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湌成宗爲軍主.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興王 9⋅11⋅12⋅14⋅15⋅16⋅17⋅18⋅23年

이 사료는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은 신라의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장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권4의 진흥왕조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료에도 나타나 있듯이 진흥왕은 548년(진흥왕 9년)부터 거의 매년 백제나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는 한편 가야를 정벌하였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크게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던 것 같다. 우선 진흥왕은 548년부터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응하면서 죽령(竹嶺) 이북 일대를 장악하였다. 특히 551년(진흥왕 12년) 거칠부(居柒夫) 등이 고구려를 공격해 10개의 군을 빼앗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신라는 그 2년 뒤인 553년 백제의 동북 지방을 공격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라의 배신에 대응하여 553년(고려 진흥왕 14년, 백제 성왕 31년) 백제 성왕이 친히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지만, 오히려 성왕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백제가 크게 패하면서 한강 유역은 완전히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음으로 진흥왕은 한반도 동북방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도 힘을 쏟아 556년(진흥왕 17년)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였다. 비열홀주는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일대로 추정되므로 당시 신라가 함경남도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摩雲嶺眞興王巡狩碑)」이다. 황초령은 함경남도 함주군 일대고, 마운령은 함경남도 이원군 일대다. 비문에 따르면 함주군과 이원군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은 친히 신하를 거느리고 방문해 이를 확인하고 백성을 교화(敎化)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진흥왕은 낙동강 방면으로도 영토를 확장하였다. 562년(진흥왕 23년)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이들을 항복시켰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가야는 대가야(大加耶)를 가리킨다고 이해되는데, 이전부터 신라에 거의 복속되다시피 한 대가야를 공격해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다. 이후 진흥왕은 고령 일대를 교두보로 삼아 지금의 서부 경남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사정은 진흥왕이 세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국보 제33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시대 순수의 성격」,『민족문화연구』4,김영하,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79.
「순행을 통해본 삼국시대의 왕」,『한국학보』5,신형식,일지사,1981.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진출 문제」,『사학지』8,이호영,단국대학교 사학회,1984.
저서
『고신라 금석문의 연구』, 김창호, 서경문화사, 2007.
『신라진흥왕순수비연구』, 노용필, 일조각, 1996.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신라의 역사』1⋅2, 이종욱, 김영사, 2002.
『금석문과 신라사』, 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편저
「순수비에 담긴 진흥왕의 꿈과 야망」, 강봉룡,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편, 푸른역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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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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