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대왕(善德大王) 11년 임인년(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함락하자 김춘추(春秋) 공의 딸 고타소랑(古陁炤娘)이 남편 김품석(金品釋)을 따라 죽었다. 김춘추는 이를 한스러워하며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하였으며,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김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김유신에게 이르기를, “저와 공은 한몸이고 나라의 중신[股肱]이 되었으니 지금 제가 만약 저기에 들어가 해를 입는다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공이 만약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왕의 뜰을 짓밟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지 않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들을 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춘추는 감격하여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면서 말하기를, “제가 날짜를 헤아려보니 60일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만일 이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서로 헤어졌고, 후에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 ……(중략)……
김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김유신은 국내의 날랜 병사 3000명을 뽑아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 열사(烈士)의 뜻이라 한다. 대체로 한 사람이 목숨을 다하면 100명을 당해 낼 수 있고, 100명이 목숨을 다하면 1000명을 당해 낼 수 있고, 1000명이 목숨을 다하면 1만 명을 당해 낼 수 있으니, 3000명이면 곧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으니 두렵다 하여 어려움을 당해 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으로 나가더라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해 출병할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 첩자인 승려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김유신의 출병 준비 소식을 고구려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앞서 김춘추가 맹세하는 말을 들었고 또 첩자의 이야기를 듣고서 감히 다시 붙잡아 둘 수가 없어 후하게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김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자신을 안내해 준 사람에게 이르기를, “나는 백제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군사를 청하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셨으니 이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지난 번 대왕께 글을 드린 것은 죽음을 면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이는 본기(本記) 진평왕
12년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은 사건이지만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古記)에 전하는 것이므로 둘 다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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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관련자료
진덕왕(眞德王)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년)에 김춘추는 앞서 고구려에 청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요청하였다. 태종(太宗)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김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하냐?”라고 하였다. 김춘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김유신은 비록 조금 재주와 지혜가 있지만 만약 천자의 위엄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찌 이웃한 근심거리를 쉽게 없애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진실로 군자의 나라로구나.”라고 하며 이에 청병을 허락하고는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 20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러 가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때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押梁州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 일에는 뜻이 없는 듯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며 몇 달을 보냈다. 압량주의 사람들이 김유신을 어리석은 장수로 여겨 그를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날이 오래인지라 힘이 남아 한 번 싸워 볼 만한데도 장군께서는 게으르니 어이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이를 듣고 백성들을 쓸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대왕에게 고하기를, “지금 민심을 살펴보니 일을 벌일 만하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 대량주에서의 치욕을 갚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작은 것이 큰 것을 범하려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은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옵니다. 그러므로 주(紂) 임금에게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났으므로, 주(周)나라의 10명의 어진 신하들이 마음을 합치고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사옵니다. 지금 저희들은 뜻이 같아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저 백제라는 것은 족히 두려할 것이 없나이다.” 하였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드디어 압량주의 군사들을 선발하여 단련시켜 적에게 나아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 밖에 이르렀는데, 백제가 오히려 미리 막고 있었다. 이기지 못하여 도망치는 체하면서 옥문곡(玉門谷)까지 이르니 백제가 그들을 가볍게 여겨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 복병이 그 앞뒤에서 일어나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는데,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가 1000명에 달하였다. 이에 사자를 시켜 백제 장군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주(軍主) 김품석과 그 처 김씨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 비장(裨將) 8명이 나에게 잡혀 엉금엉금 기면서 살려 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니,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는 머리를 제 살던 곳으로 향한다는 뜻이 생각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살아 있는 여덟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백제 중상(仲常)
【충상(忠常)이라고도 한다】
좌평(佐平)
이 왕에게 이야기하기를, “신라인의 해골을 가지고 있어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신라인이 신의를 저버려 우리 여덟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잘못은 저들에게 있고 올바름은 우리에게 있으니 무슨 근심거리가 있겠사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김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 관에 넣어 보냈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하나의 잎이 떨어진다고 무성한 숲이 줄어들 것은 없으며, 하나의 티끌이 모이더라도 큰 산에는 더해지는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8명이 살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기를 타고 백제의 영역으로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만 명을 목 베어 죽였으며 9000명을 사로잡았다. 공을 논하여 김유신을 이찬(伊湌)으로 승진시키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또 적의 영역으로 들어가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무찔러 9000여 명을 목 베어 죽이고 포로로 600명을 획득하였다.
'좌평(佐平)' 관련자료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군사 20만을 청하여 얻고 돌아와 김유신을 보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살아 돌아와 다시 공과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저는 나라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두 차례 백제와 크게 싸워 20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또한 김품석 공과 그 부인의 뼈는 고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는 모두 하늘이 주신 다행스러움이 이른 것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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