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정치통일로 가는 길

나당전쟁과 김인문⋅의상

이때 당의 유병(遊兵)으로 여러 장수와 병졸 중에서 진(鎭)을 치고 주둔하며 장차 우리나라[신라]를 습격하고자 도모하려는 자가 있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알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음 해(669)에 당(唐) 고종(高宗)이 김인문(金仁問) 등을 불러 꾸짖으며 “너희가 우리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그 군대를 해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김인문 등을) 옥사(獄舍)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서쪽으로 유학하고자 당나라로 들어가 있었는데, 찾아와 김인문을 만나보니, 김인문이 (옥사에 갇힌) 사정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의상은 이에 동쪽(신라)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보고하였다. 문무왕이 이를 매우 걱정하며 여러 신료를 모아 방어의 계책을 물어 보았다.

삼국유사』권2, 「기이」2 문호왕법민

時唐之游兵諸將兵, 有留鎮而將謀襲我者. 王覺之, 發兵之. 明年, 高宗使召仁問等讓之曰, 爾請我兵以滅麗, 害之何耶. 乃下圎扉, 錬兵五十万, 以薛邦爲帥, 欲伐新羅. 時義相師西學入唐, 來見仁問, 仁問以事諭之. 相乃東還上聞. 王甚憚之, 會群臣問防禦策.

『三國遺事』卷2, 「紀異」2 文虎王法敏

이 사료는 나당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당나라 총사령관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하고 보장왕(寶藏王, ?~682)을 데리고 귀국하였는데, 남아 있던 당나라 군사들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이 이들을 공격했고, 이후 당나라의 신라 공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 이와 관련하여 671년(문무왕 11년) 문무왕과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 614~683)가 주고받은 편지가 주목된다. 설인귀는 이미 양국이 전쟁 상황에 돌입했다고 하지만, 문무왕은 신라의 당나라 공격을 적극 부인하였다. 문무왕은 설인귀의 파견으로 전면적인 전쟁이 불가피하였지만 가급적 이를 회피하고자 했다.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신라를 포함한 삼국 전역에 지배권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문무왕이 당나라 황제의 명을 받은 군사를 공격했다면 전쟁의 책임은 신라에 있는 것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전쟁을 치르기에 앞서 김인문(金仁問, 629~694)을 옥에 가두고, 당나라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50만 대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둘째 아들로 651년(진덕여왕 5년) 이후 7차례에 걸쳐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 이적을 따라 당나라로 들어갔다. 나당 전쟁 직전에 한때 김인문은 곤경에 처했지만 당나라는 그를 신라 국왕으로 책봉하며 문무왕을 압박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를 친당적(親唐的) 인물로 평가하는 연구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당 관계의 희생양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당시 진골 출신의 신라 승려 의상(義相, 625~702)이 660년(태종무열왕 7년)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는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교학을 수학하고 있었다. 의상은 김인문으로부터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그 사실을 전하였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김인문 소전」,『문화사학』21,권덕영,한국문화사학회,2004.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백산학보』52,김수태,백산학회,1999.
저서
『의상-그의 생애와 화엄사상-』, 김두진, 민음사, 1995.
『백제부흥운동사』, 노중국, 일조각, 2003.
『나당전쟁사 연구』, 서영교, 아세아문화사, 2007.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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