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12월, 백제가 하부(下部)의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렸다. “백제 왕 신 명(明)
성왕(聖王)
과 안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나(任那)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
고구려
과 마음을 함께하여 바다 북쪽의 미야케(彌移居)
관가(官家)
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유지신(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와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영(領)인 물부막기무련(物部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
관산성(管山城)
을 공격토록 했는데, 유지신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물부막기위사기(竹斯物部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따로 아뢰었다.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이 사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했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와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신이 따로 군사 1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 1개, 도끼 300개,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
여창(餘昌)
위덕왕(威德王)
이 신라를 정벌하려고 계획을 세우자 기로(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말했다.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매우 부족하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
가 말하길 “고도는 천한 노비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내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 주어 베게 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묻었다.
【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골은 남겨 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 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한다”고 하였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 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골라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췄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 오듯 하였고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가 샛길로 도망쳐 돌아왔다. 여창이 축자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
【안교는 우리 말로 쿠로지[矩羅膩]라 한다.】
이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 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 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일본서기』권19, 「흠명천황」 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