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경제삼국의 수취제도와 역역

신라의 역역

[자비마립간 11년(468)]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니하(泥河)는 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1년

[소지마립간 8년(486)] 일선(一善) 인근의 정부(丁夫) 3000명을 징발하여 삼년성(三年城)과 굴산성(屈山城) 두 성을 고쳐 쌓았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8년

건장한 남자를 뽑아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봉수(烽燧)⋅변수(邊戍)⋅순라(巡邏)로 삼았으며, 둔영(屯營)마다 부오(部伍)가 조직되어 있다.

『수서』권81, 「열전」46 동이열전 신라전

(十一年)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泥河一名泥川】.

『三國史記』卷3, 「新羅本紀」3 慈悲麻立干 11年

(八年)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

『三國史記』卷3,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8年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戍⋅邏俱有屯管部伍.

『隋書』卷81, 「列傳」46 東夷列傳 新羅傳

이 사료는 신라 시대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의 상황을 보여 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세금을 부담해야 하고, 20세 이상 남성이라면 군대도 가야 한다. 이는 국민의 4대 의무 중 납세의 의무와 국방의 의무에 해당한다. 신라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가혹한 역역(力役)의 의무가 있었다. 조세 못지않게 역역을 지는 것 역시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역은 크게 군역과 요역으로 나뉜다. 군역은 오늘날 국방의 의무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요역과 같은 형태의 수취 제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역은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형태를 말한다.

삼국사기』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1년(468)조에는 하슬라(何瑟羅)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하슬라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으로, 이곳에 사는 15세 이상의 사람을 징발해 성을 쌓는 작업을 시켰다고 한다. 즉 요역에 동원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15세 이상‘이라는 특정한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기사는 같은 책의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조에도 보이는데, 여기에 따르면 486년 일선군(一善郡) 인근의 정부(丁夫) 3000명을 징발하여 삼년성(三年城)과 굴산성(屈山城)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일선군은 지금의 경북 선산 지역이며, 여기서는 징발 대상을 ‘정부’로 표현하고 있지만 자비마립간 11년조에 언급된 ‘15세 이상’과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이는 곧 15세부터 역역의 의무를 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몇 세까지 역역의 의무를 졌는지 알려 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 설씨녀(薛氏女)전에 나오는 설씨녀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병으로 쇠약하였음에도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던 것으로 보아, 15세부터 상당한 나이까지 역역의 의무가 부과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서(隋書)』 「신라전」에 건장한 남자를 뽑아 군대에 편입시켰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서 ‘건장한 남자’ 역시 ‘15세 이상’이나 ‘정부’와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소지마립간 8년조의 기사에서 주목을 끄는 또 다른 내용은 3000명이라는 정부의 수까지 명기하여 요역에 징발한 점이다. 이는 어느 한 지역의 주민을 무작위로 징발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의도적으로 15세 이상의 정부 3000명을 징발하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신라는 5세기 후반 무렵에 각 가호(家戶)의 사정을 헤아려 요역에 동원할 사람을 징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에는 당시 미성년 소년과 소녀가 각각 소자(小子)와 소녀(小女)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가 집집마다 연령별⋅성별 등 세부적으로 인구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구를 세부적으로 집계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정 지역 내에서 특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원하는 수만큼 징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선군 지역에서 이렇게 징발된 3000명은 삼년성과 굴산성을 고쳐 쌓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삼년성은 충북 보은군에 남아 있는 삼년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고, 굴산성은 충북 옥천군에 자리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지금의 경북 선산에서 징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요역의 부담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성을 쌓는 작업의 고단함은 말할 것도 없고, 먼 곳까지 이동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이는 그만큼 국가의 요역 동원 체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을 염두에 두고 자비마립간 11년조와 소지마립간 8년조의 기사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두 기사에서 성을 쌓기 위해 징발하는 대상을 전자는 15세 이상인 사람으로, 후자는 정부(丁夫)로 규정하고 있으나, 후자만 3000명이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요역 동원 체제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전자에 비해 후자가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역 동원 체제가 한층 체계적으로 진전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두 기사는 단편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요역 동원 체제의 변화와 관련된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한편 『수서』 「신라전」에 의하면 군대에 편입된 사람들에게 봉수(烽燧)⋅변수(邊戍)⋅순라(巡邏) 등의 임무를 맡겼으며, 각 군영마다 부오(部伍)가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군역은 임무가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역도 이렇게 세분화된 임무가 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즉 성을 쌓기 위해 일선군 지역에서 3000명을 징발하였다고 해서 이들에게 모두 동일한 임무를 맡겼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부는 돌을 나르는 작업에 투입되고, 일부는 돌을 다듬는 작업을 맡기도 하고, 일부는 성벽을 쌓는 작업에 참여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신라의 요역과 군역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지만, 이렇듯 요역과 관련된 자료와 군역과 관련된 자료를 비교하면서 검토해 보면 당시 역역의 본래 모습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한국고대사회의 신분과 부담」,『한국고대사연구』12,조법종,한국고대사학회,1997.
「신라 중고의 지방통치조직에 대하여」,『한국사연구』23,주보돈,한국사연구회,1979.
저서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김기흥, 역사비평사, 1991.
『신라병제사연구』, 이문기, 일조각, 1997.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장창은, 신서원, 2008.
편저
「경제」, 전덕재,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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