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왕[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이 영(令)을 내려 원화(原花)를 폐지하였다. 여러 해 뒤에 왕은 다시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왕은] 다시 영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花郞)
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花郞國仙)의 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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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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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군(劒君)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近郞)의 무리[徒]에 이름을 올려 두고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일(大日) 이찬(伊湌)의 아들이 화랑
이 되어 ‘근랑’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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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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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동안 이름난 사람(名世)이 배출되니, 원랑(原郞)⋅난랑(鸞郞) 같은 적선(謫仙)들이 명승지를 두루 찾아 한가로이 노닐었고, 친히 찾아와 입문(入門)한 자가 천이며 만을 헤아렸습니다. ……(중략)…… 계림(鷄林)의 『선적(仙籍)』을 살펴보니 위는 동월(東月), 아래는 서월(西月)로서, “내가 만든 이 법을 옛 법으로 삼아서 해마다 살피는 것을 거르지 말라.”라고 하고는 자손에게 물려주시니, 그 내용이 서책에 남아 있습니다.
『동문선』권31 「표전」 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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