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사회법률과 사회 풍속

신라의 법률 제정

[법흥왕 7년(520)] 봄 정월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해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관리의]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 7년

[法興王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法興王 7年

이 사료는 520년(법흥왕 7) 신라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 제23대 법흥왕조와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봉암사 지증 대사 탑비(鳳巖寺智證大師塔碑)」에도 법흥왕 대에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삼국유사』나 「봉암사 지증 대사 탑비」의 경우에는 법흥왕 대에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점만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7년조에는 율령의 반포 시점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고, 율령의 반포가 관리의 공복 제정과 함께 이루어졌음을 언급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법흥왕 7년에 율령이 반포되었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신라에 법체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4 탈해왕(脫解王)조를 살펴보면 경주 반월성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후일 신라 제4대 왕이 되는 석탈해(昔脫解, 재위 57~80)와 호공(瓠公)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고, 양자 사이에서 분쟁이 해결되지 않자 이 문제를 관(官)에 신고하여 처결을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당시에도 그와 같은 분쟁을 해결하는 나름의 절차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죄수를 사면하였다는 기록이 종종 보이는데, 이 역시 율령 반포 이전에도 일정한 법체계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법흥왕 7년 율령이 반포되기 이전에는 관습법과 같은 형태의 법체계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근래에 발견된 금석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501년에 건립되었다고 여겨지는 「포항 중성리 신라 비(浦項中城里新羅碑, 보물 제1758호)」와 503년에 건립된 「영일 냉수리 신라 비(迎日冷水里新羅碑, 국보 제264호)」는 지방에서 모종의 분쟁이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분쟁을 처리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두 비문에 보이는 분쟁의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해당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재판을 열고 ‘교(敎)’라는 형식을 빌려 그 결과를 공포하였다. 또한 분쟁의 발생 원인부터 재판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비문상에 적어 둠으로써 향후 동일한 분쟁이 일어날 경우 처결하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같은 측면 때문에 「포항 중성리 신라 비」와 「영일 냉수리 신라 비」의 성격을 소송의 결과를 담은 ‘판결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문헌 자료나 동시대 금석문의 내용을 통해 율령이 반포되는 시점인 520년 이전에도 신라에 일정한 법체계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개별 사건에 대한 처결 결과는 적용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특정 사건에 대한 처결 결과와 각종 판례 등을 집대성하여 사안별로 분류하고, 이를 일반화시켜 보편성을 띤 법률 조항으로 만들 필요성이 새로이 생겨났다. 그 결과 법흥왕 7년 율령이 반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율령이 중국이나 고구려의 율령 등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신라 고유의 전통적인 법체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신라 율령의 구체적인 조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기는 힘든 실정이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7년조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율령의 반포가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여 붉은색과 자주색을 통해 위계를 구분한 조치와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율령의 반포와 공복의 제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그 동안의 법체계를 정비해 성문법(成文法)을 성립시킨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행정 법규의 정리가 함께 이루어졌고, 이는 나아가 신라의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 정비와도 맞물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율령 반포를 전후해 병부(兵部)의 설치, 불교 공인, 17 관등 체계의 완비 등과 같은 조치가 단행되었다는 점은 율령의 반포가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의 정비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7년조의 기사는 율령의 반포와 관리의 공복 제정이란 아주 단편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이를 통해 신라가 추구하였던 국가 체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의 가치가 상당하다고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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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율의 기본성격 -형벌체계를 중심으로-」,『한국사론』 50,홍승우,서울대학교 국사학과,2004.
저서
『삼국시대 율령의 고고학적 연구』, 산본효문, 서경문화사, 2006.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이기동 외, 주류성,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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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냉수리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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