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문화불교사상의 전개

백제의 석가불 신앙

백제(百濟) 창왕(昌王) 13년 태세 정해(丁亥)에 왕의 누이인 형공주(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하였다.

「백제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 妹兄公主供養舍利.

「百濟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

이 사료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百濟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 일명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의 명문(銘文)으로, 지난 1993년부터 발굴이 진행된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과 나성(羅城)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이 능산리 사원 터에서는 사리감과 함께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사리감의 감실 좌우 양쪽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다. 이 글자를 통해 사리감이 만들어진 시기와 목적, 사리감을 만든 주체가 알려지게 되면서 사료가 부족하여 연구가 충분치 못하던 백제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 대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명문에 따르면 사리감은 백제 창왕(昌王), 즉 위덕왕 13년(567)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감 제작 연대가 능산리 사원의 창건 연대와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 시기를 즈음해 능산리 사원의 창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는 있다. 따라서 능산리 사원은 567년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학계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왜 능산리 사원이 창건되었으며, 그것을 창건한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대개 능산리 사원에 대해서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죽은 성왕(聖王, 재위 523~554)을 기리기 위한 왕실의 원찰(願刹)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관계하여 왕릉의 관리를 담당하는 능사(陵寺)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둘의 역할을 나누어서 보기도 하나, 현재로서는 대체로 능산리 사원 자체가 왕실의 원찰로서 왕실 및 왕권을 보위하는 국가 불교의 중심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위덕왕 대에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 책임이 위덕왕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왕권에 대한 견제가 심했던 시기이며, 이로 인해 위덕왕은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위덕왕은 불교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능산리 사원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능산리 사원과 그곳에서 발견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의 명문 내용에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 중 하나가 바로 ‘불사리(佛舍利)’로 상징되는 석가불(釋迦佛) 신앙이다. 이 시기 백제에서 석가불이 많이 신봉되고 있었음은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金銅鄭智遠銘釋迦如來三尊立像)과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경우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운데 입상이 석가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6세기 후반부터 있었던 석가불 신앙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러한 석가불은 바로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석가불을 상징하는 ‘사리’를 위덕왕의 누이가 자신의 아버지인 성왕을 위해 능산리 사원에 공양하였다는 사실은 위덕왕이 당시 취약한 왕권을 석가불의 권위를 빌려 제고하고자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상황과 대외관계」,『한국상고사학보』43,김병남,한국상고사학회,2004.
「백제 위덕왕대 부여 능산리 사원의 창건」,『백제문화』27,김수태,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98.
「백제 위덕왕의 정치와 외교」,『한국인물사연구』2,김수태,한국인물사연구소,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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