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문화불교사상의 전개

혜숙과 정토신앙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지금의 진주(晉州)이다. 또는 강주(剛州), 즉 지금의 순안(順安)이라고도 한다.】의 선사(善士) 수십 명이 서방(西方)을 구하려는 뜻으로, 그 지역 내에 미타사(彌陁寺)를 세우고 1만 일을 기약하고 계(契)를 만들었다. 그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郁面)이라는 이름의 한 여종이 있었다. ……(중략)…… “『승전(僧傳)』을 살펴보니, ……(중략)…… 아간의 집은 혜숙(惠宿) 법사가 세운 미타사와 거리가 멀지 않았다. .……(중략)……”고 운운하였다.

삼국유사』권5, 「감통」7 욱면비염불서승

승려 혜숙(惠宿)이 호세랑(好世郞)의 무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호세랑이 이미 화랑도의 명부[黃卷]에서 이름이 빠지자 혜숙 스님 또한 적선촌(赤善村)【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 년이 되었다. 당시 국선(國仙)인 구참공(瞿旵公)이 일찍이 그 부근에 와서 사냥을 하던 어느 날 혜숙이 길가에 나와 고삐를 잡아당기며 청하여 말하기를, “소승 또한 따라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종횡으로 달리며 웃통을 벗어 던지고 앞으로 나아가자 공이 벌써 기뻐하였다.

피로를 풀고 앉아서 계속 고기를 굽고 삶아 서로 건네었고, 혜숙 또한 더불어 뜯어먹는데 싫은 기색이 거의 없었다. 이윽고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여기에 맛있는 고기가 있으니 더 드리려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좋다.”라고 하였다. 혜숙이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그 넓적다리 살을 베어 소반에 담아서 드리니 옷에 피가 젖어 뚝뚝 떨어졌다. 공이 몹시 놀라며 말하기를, “어쩌자고 이리 하였는가?”라고 하였다.

혜숙이 말하였다. “처음 저는 공이 어진 사람이라 능히 자기를 헤아려 만물을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 공이 좋아하는 바를 살펴보니 오직 살육에만 열중하여 남을 해쳐 스스로를 살찌울 따름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제가 따를 무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옷을 털고 가 버렸고, 공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가 먹던 것을 보니 소반 속의 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공은 매우 이상하게 여겨 돌아가서 조정에 아뢰었다.

진평왕(眞平王)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이게 하였는데,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서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중사(中使)는 이를 추하다고 생각해 7~8리를 되돌아 가다가 길에서 혜숙 스님을 만났다. 그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묻자 혜숙이 말하기를, “도성 안 시주 집[檀越家]의 7일재에 갔다가 자리가 끝나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중사가 그 말을 임금에게 아뢰니 (왕이) 또 사람을 보내 시주 집을 조사하였는데, 그 일 또한 사실이었다.

삼국유사』권4, 「의해」5 이혜동진

景徳王代康州【今晋州, 一作, 剛州, 則今順安】善士數十人, 志求西方, 於州境創彌陁寺, 約万日爲契. 時有阿干貴珎家一婢名郁面. ……(中略)…… 按僧傳 ……(中略)……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陁寺不遠. ……(中略)…… 云云.

『三國遺事』卷5, 「感通」7 郁面婢念佛西昇

釋惠宿, 沉光於好世郎徒, 郎旣讓名黄卷, 師亦隠居赤善村【今安康縣有赤谷村】二十餘年. 時國仙瞿旵公嘗徃其郊, 縱獵一日, 宿出於道左, 攬轡而請曰, 庸僧亦願随從可乎, 公許之. 於是縦横馳突, 祼袒相先, 公旣悅.

及休勞坐, 數炮烹相餉, 宿亦與啖囓, 略無忤色. 旣而進於前曰, 今有美鮮於此, 益薦之何. 公曰善. 宿屏人割其股, 寘盤以薦, 衣血淋漓. 公愕然曰, 何至此耶.

宿曰. 始吾謂公仁人也, 能恕己通物也. 故從之爾. 今察公所好, 唯殺戮之躭篤, 害彼自飬而已. 豈仁人君子之所爲. 非吾徒也. 遂拂衣而行, 公大慚, 視其所食, 盤中鮮胾不滅. 公甚異之, 歸奏於朝.

眞平王聞之, 遣使徴迎, 宿示卧婦床而寢. 中使陋焉, 返行七八里, 逢師於途. 問其所從来, 曰, 城中檀越家, 赴七日齋, 席罷而來矣. 中使以其語逹於上, 又遣人撿檀越家, 其事亦實.

『三國遺事』卷4, 「義解」5 二惠同塵

이 사료는 신라 정토 신앙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아미타불을 읊음으로써 극락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정토 신앙은 신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사료에 등장하는 미타사(彌陀寺) 역시 문자 그대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사찰을 뜻하므로 혜숙이 아미타불, 즉 정토 신앙과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혜숙의 활동은 『삼국유사』권4의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 보다 상세히 전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화랑이었던 호세(好世)의 낭도였으나 호세가 화랑도(花郞徒)의 명부에서 이름이 빠지자 20여 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부르려 하자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는 모습을 보여 주거나 7일재에 참석함으로써 결국 응하지 않았다. 이는 혜숙이 세속적인 출세를 단념한 동시에 지배층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승려임에도 여자의 침상에 누웠다거나 구참(瞿旵)과 함께 고기를 뜯어먹었다는 것은 불교의 계율(戒律)에도 어긋나는데, 이 같은 파격적인 모습은 훗날 정토 신앙을 보급하는 데 크게 공헌한 원효(元曉, 617~686)의 파계 이후 행동에 견줄 만하다. 이 때문에 적선촌(赤善村)에서 숨어 지내는 등 염세적(厭世的) 모습을 보인 것과 더불어 승려로서 혜숙이 보여 준 반(反)계율적 태도는 그가 정토 신앙과 연결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혜숙은 20여 년 동안 적선촌에 숨어 살다가 국선(國仙), 즉 화랑인 구참이 사냥을 위해 근처에 온 것을 계기로 그를 따랐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헤아려 만물을 통하게 하지 못하고 살육에만 열중하는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구참을 꾸짖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20년이나 숨어 살던 혜숙이 진평왕 대에 잠깐이나마 화랑인 구참에게 무언가 기대를 걸고 따랐다는 사실이다. 진평왕 대의 화랑이던 김유신(金庾信, 595~673)이 거느린 낭도가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린 점은 당시의 화랑도가 미륵 신앙과 결부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는데, 구참 역시 비슷한 시기에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므로 그 역시 미륵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혜숙이 이처럼 구참에게 기대를 건 것은 바꾸어 말하면 미륵 신앙에 무언가 기대고자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혜숙이 결국 구참에게 실망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는 점은 곧 혜숙이 미륵 신앙과도 결별하였음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혜숙이 처음부터 정토 신앙에 관심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가 호세의 낭도였다거나 화랑인 구참을 잠시나마 따랐던 점을 고려하면 한동안 미륵 신앙에 호의를 가졌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자 미륵 신앙을 버리고 정토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혜공(惠空)⋅사복(虵福) 등 신라 중고기에 정토 신앙을 가졌던 이들은 대개 6두품 이하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혜숙 역시 화랑의 낭도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의 신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롭다. 정토 신앙은 기본적으로 진골 귀족을 제외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음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토 신앙의 발생이 골품제(骨品制)를 비롯한 신라 사회가 지닌 모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혜숙이 구참을 꾸짖으면서 “남을 해쳐 스스로를 살찌울 따름”이라고 한 것은 결국 진골 귀족이 향유하는 특권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는 셈이다. 따라서 혜숙과 관련한 사료는 신라 정토 신앙의 기원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여러 모로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아미타신앙의 성립과 그 배경」,『한국학보』29,김재경,일지사,1982.
저서
『한국 가요의 연구』, 김동욱, 을유문화사, 1961.
『신라불교사상사연구』, 김영미, 민족사, 1994.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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