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문화도교 사상의 전파

연개소문의 도교 수용

[보장왕 2년(643)] 3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에게 아뢰기를,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대왕이 매우 그러하다고 여기고 표(表)를 올려서 (도교를) 요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고, 이와 함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내주었다. 왕이 기뻐하여 불교 사찰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상) 2년

[寶藏王二年] 三月, 蘇文告王曰, 三教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並興, 而道教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教以訓國人. 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逹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取僧寺館之.

『三國史記』卷21, 「高句麗本紀」9 寶藏王(上) 2年

이 사료는 고구려의 도교 수용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 사료에 따르면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은 유교, 불교, 도교 세 가지 사상이 모두 갖추어져야 하지만 현재 고구려에 도교가 없으므로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이 받아들여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용하였다. 도교는 중국 고대의 신선 사상(神仙思想)을 바탕으로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 그리고 각종의 토착 사상이 어우러진 사상이자 종교였다. 그러므로 도교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예컨대 신선 사상만 두고 보자면 고구려에서는 이미 4~5세기부터 도교가 수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여러 신선이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사료에서 말하는 도교는 당나라에 의해서 체계화된 도교와 그 사상을 의미한다. 당나라 황실은 노자(老子) 이이(李耳)를 조상으로 여겼다. 따라서 노자에게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노자의 『도덕경』을 전국에 보급하는 한편 과거의 한 과목으로 채택할 정도로 도교를 우대하였다. 또한 국가가 도교 교단을 통제하며 1만 5000이 넘는 도사를 양성하였으며, 그들을 전국 2000개 이상의 도관(道觀)에 배치하였다. 이렇듯 당나라가 도교를 중시한 점을 고려하면, 연개소문의 도교 수용은 일단 고구려의 대당(對唐) 정책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집권한 만큼 정권 기반이 취약했고, 따라서 대외 관계에서 유화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이를 위해 도교를 수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사료에서 불교 사찰을 빼앗아 도사들을 머물도록 했다고 한 점이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 ?~?)이 이러한 도교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백제로 망명했다고 한 점으로 보면, 연개소문의 도교 수용은 정치사상적인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도교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내세우므로 정치사상적으로 자유스러운 면모가 있었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 도교의 정치사상은 법가(法家)에 가까웠다고 한다. 강력하고 철저한 법치를 통해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정치가 운영되도록 한다는 것이 도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므로 도교의 정치사상은 연개소문이 정치 권력을 오로지하는 것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었다. 이처럼 연개소문의 도교 수용은 대당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연개소문의 집권과 도교」,『역사학보』99⋅100합,이내옥,역사학회,1983.
저서
『한국고대사의 연구』, 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고구려 불교사 연구』, 정선여, 서경문화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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