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에 보이는 도교사상
(표면)
병오년(丙午年, 526년) 12월 백제국 왕대비(王大妃)가 천명(天命)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유지(酉地)에서1)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己酉年, 529년) 계미(癸未)일이 초하루인 2월의 갑오(甲午)일인 12일에 다시 대묘(大墓)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이면)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乙巳年, 525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상기의 금액으로 매주(賣主)인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상하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리에게 문의하여 신지(申地)2)를 매입해서 능묘(陵墓)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확한 증험으로 삼는다. 부종율령(주문이므로 해석하지 않음. 또는 모든 율령(律令)에 구애 받지 않는다.).
「무령왕릉지석」
(表面)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裏面)
錢一万文. 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武寧王陵誌石」
이 사료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을 통해 백제에서 도교 사상을 수용하였음을 보여 준다. 무령왕릉은 육조(六朝) 시대에 발전한 도교의 영향을 받아 건축되었다. 도교 사상은 본래 내세보다는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 목적으로 삼는 특징이 있다. 도교가 발전함에 따라 현세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 믿음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게 되었으며, 이는 무령왕릉의 매지권에도 충분히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백제에서는 『주서(周書)』에 보이는 “승니사탑(僧尼寺塔)은 많으나 도사(道士)가 없다.”라는 기록으로 인해 교단 조직을 갖춘 도교가 성립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권24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 1년조에 전하는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가(道家)의 말을 인용하여 간언하는 기록을 통해 본다면, 4세기 이전 단계에 이미 도가 사상이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서』나 『북사(北史)』 등에서 음양오행을 알았다거나 역(曆)으로 대변되는 천문, 의약⋅복무(卜莁), 점상술(占相術) 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백제에서 도교적 잡술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교에 대한 이해는 무령왕릉이 축조되는 시기를 즈음하여 더욱 빠르게 파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백제와 교류가 빈번했던 남조에서는 도홍경(陶弘景, 456~536)이 상청파(上淸派)의 교리를 완성하였다. 백제에는 이러한 남조의 도교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 대향로와 같은 도교적 성격을 가진 유물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 중에서도 이러한 도교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왕비의 매지권에는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상하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지하를 지배하는 신으로 당나라의 두광정(杜光庭, 850~933)이 편찬한 도교 경전인 『옥추경(玉樞經)』에 나오는 지신들의 명칭인 토황(土皇)⋅토후(土侯)⋅토백(土伯)⋅토공(土公)⋅토모(土母)⋅토자(土子)⋅토손(土孫) 등과 유사한 측면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들 지신의 이름이 도교로부터 유래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지권의 내용에 따르면 무령왕은 이들 지신으로부터 묘지를 매입한 것이 되며, 중국의 매지권에서도 토지신과 권속이 묘지 매매의 주체로 많이 기록되고 있다.
한편 매지권에 기록된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표현 역시 도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율령은 본래 고대 국가에서 관습법을 초월하여 국가적으로 획일화된 법제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도교적 상징을 강조하는 경우 율을 천율(天律)로, 영을 제령(帝令)으로 보아 만법지조(萬法之祖)인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영으로 귀신을 부리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이 외에 번개보다 빠른 뇌부(雷部)의 귀신 이름으로 도교 경전이나 부적에서 그를 가리켜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라는 주문(呪文)을 쓴 데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중국의 매지권은 마지막의 문구가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여천제율령(如天帝律令)’ 등과 같이 모두 “율령을 따른다”고 되어 있다. 반면 무령왕릉 매지권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은 말 그대로 “율령을 따르지 않는다”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부종율령(不從律令)’의 ‘율령’을 고대 국가의 법제로서 백제의 실제 율령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백제 현실 세계에서 율령에 의하여 토지 매매가 금지되고 있었으며, 비록 허구적인 토지 매매이기는 하지만 무령왕이 사후 세계에서 금령을 어기고 토지를 매입한 것이므로 현세의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고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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