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결선생(百結先生)은 어떠한 사람인지 내력을 알지 못한다. 낭산(狼山) 아래에 살았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여 옷을 100번이나 기워서 입어 마치 메추라기를 매단 것과 같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동리(東里)의 백결선생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무릇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기쁨 그리고 마음에 못마땅한 일들을 모두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어느 해가 저물려고 할 때 이웃 동네에서 곡식을 찧었다. 그의 아내가 절구공이 소리를 듣고는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그것을 찧는데, 우리만 없으니 어떻게 한 해를 넘길까?”라고 하였다.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저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는 것이요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이니, 그것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좇을 수 없는데, 당신은 어찌 (마음) 아파하시오? 내가 당신을 위하여 절구공이 소리를 내어서 위로해 주리다.”라고 하였다. 이에 거문고를 연주하여 절구공이 찧는 소리를 내었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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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직(金后稷)은 지증왕(智證王)의 증손이다. (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을 섬겨 이찬(伊湌)이 되었고 병부령(兵部令)
의 임무를 맡았다. 진평대왕이 사냥을 매우 좋아하므로 김후직이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옛날에 임금 된 자는 반드시 하루에도 1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는데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직간(直諫)을 받아들여 부지런히 힘쓰고 부지런히 일하여, 감히 편안하게 즐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러한 후에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미친 사냥꾼과 더불어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빨리 달리기를 스스로 그치시지 못합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라고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을 일삼든지 밖으로 사냥을 일삼든지,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것을 보면, 안으로 마음을 방탕히 하면 밖으로는 나라가 망하게 되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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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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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金仁問)의 자(字)는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에 나아가 유가(儒家)의 책을 많이 읽었고, 겸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의 설(說)도 널리 읽었다. 또한 예서(隷書)와 활쏘기⋅말타기⋅향악(鄕樂)을 잘하였는데, 행동의 법도가 익숙하였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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