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문화사상의 복합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과 삼교 융회

최치원(崔致遠, 857~?)이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근본[뜻]이요, 모든 악(惡)을 만들지 말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축건 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興王 37年

이 사료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난랑비(鸞郞碑)」의 서문 가운데 유교와 불교, 도교의 융합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아쉽게도 「난랑비」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과 성격을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1478년 성종(成宗)의 명에 의해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곽동순(郭東珣)이 지은 「팔관회 선랑 하표(八關會仙郞賀表)」란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 난랑(鸞郞)은 원랑(原郞)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 화랑으로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난랑비」는 신라의 대표적 화랑이었던 난랑을 위해 세운 비석으로 볼 수 있다.

최치원은 「난랑비」의 서문에서 신라에 풍류(風流)라고 일컫는 현묘한 도가 있으며, 그것은 유교와 불교, 도교 등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뭇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노(魯)나라 사구(司寇), 즉 공자(孔子)의 가르침이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주(周)나라 주사(柱史), 즉 노자(老子)의 뜻이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축건 태자(竺乾太子),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유교⋅불교⋅도교 등 삼교의 융합에 대한 최치원의 견해는 그가 지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雙谿寺眞鑑禪師塔碑)」과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碑)」 등 다른 저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삼교의 융합에 대한 모색이 이미 당(唐)나라에서 성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桂苑筆耕)』에도 일부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최치원은 이미 당나라에서 유학 하던 시절 삼교 융합론을 접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귀국 후에는 당나라에서 접한 삼교 융합론을 신라에 적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치원이 그의 저술에서 여러 차례 삼교 융합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삼교 융합을 정치에서 실천하는 것이 국가에도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삼교의 융합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최치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신라 말의 지식인 가운데도 삼교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들이 종종 확인된다. 특히 신라 왕실 역시 삼교 융합과 무관하지 않았다. 「봉암사 지증 대사 비명」에 의하면 “경문 대왕(景文大王, 재위 861~875)께서는 마음으로는 정교(鼎敎)를 융합하셨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정교란 바로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를 가리킨다. 따라서 경문왕 역시 삼교 융합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신라 하대에는 삼교 융합이 하나의 시대적 분위기처럼 유행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신라 하대 이전에 유교⋅불교⋅도교가 어우러진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대에 만들어진 화랑도(花郞徒)의 경우 함께 모여 유교적 소양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란 화랑이 원광 법사(圓光法師, 555~638)를 찾아 세속 오계(世俗五戒)의 가르침을 받은 것을 비롯해 여러 화랑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그뿐만 아니라 화랑이 나라의 신선이란 의미의 ‘국선(國仙)’으로 불린 데서 도교와의 관련성도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화랑을 통해서도 삼교의 융합적인 측면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치원의 삼교 융합에 대한 인식이 담긴 「난랑비」 서문을 굳이 화랑의 기원에 대한 기사인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37년(576)조의 말미에 수록한 것은 바로 화랑이 삼교 융합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최치원의 난랑비서와 화랑 관련 제명칭의 갈래」,『한국 고대사 연구의 현단계』(석문 이기동교수 정년기념논총),박남수,주류성출판사,2009.
「「난랑비명」 찬술과 그 의도」,『역사학연구』34,송은일,호남사학회,2008.
「고운 최치원의 삼교융합론」,『선사와 고대』9,이재운,한국고대학회,1997.
「최치원의 삼교융합사상과 그 의미」,『신라사학보』4,장일규,,2005.
「「난랑비서」 재해석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탐구』9,최영성,한국고대사탐구학회,2011.
저서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사산비명 찬술』, 곽승훈, 한국사학, 2005.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장일규, 신서원, 2008.
『최치원의 사상연구』, 최영성, 아세아문화사, 1990.
편저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 한국사학회⋅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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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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