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삼국 시대문화삼국의 예술과 문화

일본에 문화를 전해 준 담징

[추고천황] 18년(610) 봄 3월, 고구려 왕이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바쳤다. 담징(曇徵)은 5경(五經)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를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를 만드는 일은 이때에 시작된 듯하다.

『일본서기』권22, 「추고천황」 18년

[推古天皇] 十八年春三月, 高麗王貢上僧曇徵⋅法定. 曇徵知五經, 且能作彩色及紙墨, 幷造碾磑. 蓋造碾磑, 始于是時歟.

『日本書紀』卷22, 「推古天皇」 18年

고대 한일 양국은 정치⋅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기존에는 그 교섭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대개 백제와 왜(倭)의 문물 교류를 중심으로 파악을 했으나, 최근에는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고구려와 신라 역시 당시 정세에 따라 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료는 그 가운데 특히 고구려와 왜와의 대외 관계를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6~7세기 중국에 수(隋)⋅당(唐)의 통일 제국이 성립한 사건은 주변 국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이 분열되었던 사실에 기반한 기존 대외 정책과는 다른 정책이 각국에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는 왜와의 관계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중국과 군사적 대치 상황에 놓이게 된 고구려에게는, 후방의 백제나 신라와의 관계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 나타났고, 따라서 왜와의 관계 역시 그 중요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왜도 비슷했다. 당시 왜 정권은 집권적 고대 국가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선진 문물이 요구되었다. 왜는 그동안 주로 백제를 통해 이러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가씨[蘇我氏]를 비롯한 호족이 중심이 된 정권에 대항하여 천황권 확대를 꾀했던 왜의 천황가(天皇家)는 기존 소가씨의 친백제 정책에서 벗어나 고구려, 신라 및 수나라와 관계를 맺는 다면적 외교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고구려와의 관계가 중시되었다.

고구려가 대왜 외교 관계를 형성해 가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주로 승려들이었다. 이는 당시 왜가 외교 관계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이 주로 불교와 같은 선진 문물이었으며, 따라서 고구려에서도 불교 문물을 비롯하여 많은 승려를 보냈기 때문이다. 사료에 보이는 담징(曇徵, 579~631)과 법정(法定)이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특히 담징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법륭사(法隆寺)의 금당(金堂)에 벽화를 그린 인물로 전한다. 그런데 담징의 역할은 불교 문물의 전파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담징은 5경(五經) 이외에 제지법(製紙法)과 먹을 제작하는 방법 등을 전해 주었다. 경전을 전하고 제지법과 먹의 제작 방법을 전한다는 것은 당시 유교와 불교의 도입을 통해 고대 국가로의 발전을 꾀하던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담징은 단순히 불교 승려로서만이 아니라 학문과 제지 기술 등의 선진 문물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백제의 박사(博士)⋅장인(匠人)이 했던 선진 문물 및 기술의 전파자로서도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6〜7세기 고구려의 대왜관계」,『한일관계사연구』26,연민수,한일관계사학회,2007.
편저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Ⅲ, 김현구 외, 일지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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