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 37년(576)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 무리들을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후 발탁해 기용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미녀 2명을 뽑았는데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시기하여 다투었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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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뽑아 단장하고 꾸며 화랑(花郞)
이라 이름하고 그들을 받들었는데,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기뻐하였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그 중 착한 사람을 뽑아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말하기를, “현명한 보좌진과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어진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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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불교⋅도교를 가리킴
를 포함하여 많은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장차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노(魯)나라 사구(司寇)
공자를 가리킴
의 가르침이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주나라 주사(柱史)
노자를 가리킴
의 근본이요, 모든 악을 만들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를 가리
의 가르침이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국기(新羅國記)』에서 말하기를, “귀인(貴人)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르기를 화랑
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어 섬겼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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