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정치신라의 통일과 국가 체제 정비

성덕왕 대의 제도 및 문물 정비

[성덕왕 10년(711)] 11월에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에게 보여 주었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0년

[성덕왕 12년(713)] 봄 2월에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2년

[성덕왕 13년(714)] 2월에 상문사(詳文司)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치고 표문(表文) 쓰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3년

[성덕왕 16년(717)] 봄 2월에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인씩 두었다. ……(중략)…… 가을 9월에 당(唐)나라에 갔던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과 10철(哲) 및 72제자(弟子)의 초상화를 바치자, 곧 태학(太學)에 안치하였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6년

[성덕왕 17년(718)] 여름 6월에 ……(중략)……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7년

[聖德王 十年] 十一月, 王製百官箴, 示羣臣.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10年

[聖德王 十二年] 春二月, 置典祀署.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12年

[聖德王 十三年] 二月, 改詳文司爲通文博士, 以掌書表事.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13年

[聖德王 十六年] 春二月, 置醫博士⋅筭博士各一員. ……(中略)…… 秋九月, 入唐大監守忠廻, 獻文宣王十哲⋅七十二弟子圖, 卽置於大學.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16年

[聖德王 十七年] 夏六月 ……(中略)…… 始造漏刻.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17年

이 사료는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이 제도와 문물을 정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덕왕은 통일 이후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즉위 이후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등 이른바 ‘전제 왕권’으로 불리는 신라 중대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삼국사기』 권8의 성덕왕조이다.

성덕왕은 즉위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는데, 그런 측면에서 711년(성덕왕 10년)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백관잠의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백관잠’의 ‘백관(百官)’이 모든 신료를 의미하고 ‘잠(箴)’은 경계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면, 백관잠은 전제 왕권 아래에서 모든 신료가 받들어야 할 일종의 행동 지침[戒名]을 적은 것으로 추정되며, 왕권을 제약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일종의 견제로 볼 수도 있다.

713년(성덕왕 12년)에는 제사를 관장하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고, 717년(성덕왕 16년) 당(唐)나라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 즉 문선왕(文宣王)과 그 제자들의 초상화를 바치자 성덕왕은 국학인 태학(太學)에 이를 안치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성덕왕이 유교적 측면에 입각해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음을 뜻한다. 그리고 717년에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명씩 신설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누각(漏刻), 다시 말해 물시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 천문⋅역산학은 흔히 ‘제왕(帝王)의 학문’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유교에서는 천문을 관찰하여 농경에 필요한 4계절의 변화와 규칙성을 살펴 백성에게 알려 주는 것을 제왕의 중요한 임무로 꼽았다. 따라서 산박사의 신설과 누각의 설치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성덕왕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성덕왕은 상문사(詳文司)를 고쳐 통문박사(通文博士)로 삼고 표문(表文) 쓰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재위 36년 동안 모두 43회에 걸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전체 횟수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렇듯 성덕왕 대에 당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에서 들여 온 제도와 문물을 통해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목표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당적인 외교 노선을 통한 왕권의 강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견지하였던 정책 방향이었다. 그러므로 통문박사를 설치하여 표문 작성을 전담케 한 조치도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덕왕은 여러 측면에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정비를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이 왕권 강화에 이바지함으로써 신라 중대 ‘전제 왕권’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성덕왕대의 정치와 사회 -‘군자국’의 내부사정-」,『역사학보』160,이기동,역사학회,1998.
「신라 성덕왕대 대당외교정책연구」,『이화사학연구』19,조이옥,이화사학연구소,1990.
저서
『신라중대정치사연구』, 김수태, 일조각, 1996.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박해현, 국학자료원, 2003.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74.
편저
「전제왕권과 귀족」, 김수태,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련 이미지

성덕대왕신종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