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정치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

96각간의 난과 혜공왕의 죽음

[대력(大曆) 2년 정미(丁未), 767] 7월 3일에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반란이 일어나고 서울과 5도(道) 주군(州郡)의 총 96명 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재산과 보물과 비단 등을 모두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자 사량(沙梁)⋅모량(牟梁)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적들이 보(寶)에 보관한 곡식도 왕궁으로 실어 들였다. 난리가 3개월 만에 그치고, 상을 받은 사람도 제법 많았으나 죽임을 당한 자도 수없이 많았다. 표훈(表訓)의 말에 나라가 위태롭다고 한 것이 이것이었다.

삼국유사』권2, 「기이」2 혜공왕

[大曆二年丁未] 七月三日, 大恭角干賊起, 王都及五道州郡并九十六角干相戰大乱. 大恭角干家亡, 輸其家資寳帛于王宫. 新城長倉火燒, 逆黨之寳穀在沙梁⋅牟梁等里中者, 亦輸入王宫. 乱㢱三朔乃息, 被賞者頗多, 誅死者無筭也. 表訓之言國殆, 是也.

『三國遺事』卷2, 紀異 2, 惠恭王

이 사료는 767년(혜공왕 3년) 또는 768년(혜공왕 4년) 발생한 신라 96각간(角干)의 난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이다. 96각간의 난은 전제 왕권으로 대변되는 신라 중대가 막을 내리고 신라 하대가 시작되는 실마리가 된 사건이다. 연도는 『삼국사기』에는 난이 발발한 시점을 768년 7월이라고 했으나, 『삼국유사』 및 『신당서』에는 767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중대 전제 왕권을 지향하며 진골 귀족과 끊임없이 대립하던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이 즉위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어린 왕(혜공왕)은 여자가 될 사람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임금이 되기까지 항상 여자들이 하는 놀이를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도류(道流)와 어울려 놀았다. 이 때문에 이 나라에 큰 난이 일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유사』권2,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즉, 아버지 경덕왕이 나라가 위태로워도 아들을 두어 왕위를 계승시키겠다는 집착으로 표훈(表訓) 대덕(大德)의 도움을 받아 여자가 될 혜공왕을 남자로 태어나게 하였으므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 계로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한 경덕왕의 과욕이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혜공왕은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어머니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을 했지만, 경덕왕 때부터 노출되기 시작한 진골 귀족의 불만을 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즉위 이래 불길한 징조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는데, 드디어 즉위한 지 3(4)년째인 767(768)년 7월에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삼국사기』에는, “일길찬 대공(大恭, ?~768)이 아우 아찬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나 왕의 군사가 이를 쳐서 평정하고 구족(九族)을 목 베어 죽였다.”라고 되어 있다(『삼국사기』권9, 혜공왕 4년 7월). 또한 이때 왕도(王都) 및 5도(道)와 주군(州郡)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워졌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을 보면, 각간 대공의 난을 시작으로 귀족들의 반란이 전국적인 규모로 번져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96각간 모두가 반란군이 아니라, 반란군과 그것을 진압하고자 하는 왕실 측의 군대로 나뉘어 싸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공의 난은 왕의 측근 인물인 이찬(伊湌) 김은거(金隱居, ?~775)를 비롯한 왕실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혜공왕 대의 대혼란을 예고하는 첫 신호로, 그 뒤 신라 조정은 반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안정을 찾지 못하고 동요하였다. 혜공왕은 선대의 왕들과 달리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갖지 못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중 780년(혜공왕 16) 이찬 김지정(金志貞, ?~780)의 반란이 발생하고, 이 반란을 진압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 ?~785)과 이찬 김경신(金敬信, ?~798) 세력에 의해 혜공왕과 왕비도 살해되었다. 그리고 김경신의 추대로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무열왕 계로 이어진 신라 중대는 막을 내리고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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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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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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