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정치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

원성왕계의 등장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나물왕/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 김씨는 신술(神述) 각간(角干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반역하는 신하가 발호했을 때 선덕(宣德)은 당시 상대등(上大等)으로서 임금 주위에 있는 나쁜 무리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하였다. 경신도 여기에 참가하여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선덕이 즉위하자 곧바로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의논한 후 왕의 조카뻘 되는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큰 지위는 본래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 본디부터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를 가졌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단번에 일치하여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원년 춘1월 13일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朴氏繼烏夫人, 妃金氏, 神述角干之女. 初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洎宣德卽位, 卽爲上大等.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元聖王 元年 春1月 13日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부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강력한 전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각종 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골품제 하에서는 왕을 전제군주가 아니라 대등한 귀족 집단의 대표자 정도로 간주하는 뿌리 깊은 인식이 쉽게 사라질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평화는 표면적인 것일 뿐 왕실이 전제정치를 강화할수록 귀족 세력과의 긴장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린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이 즉위하자 정치적 혼란으로 진골 귀족들의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으며,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혜공왕이 피살되어 중대 무열왕계가 끝나고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다. 이 사료는 신라 하대 왕위 계승과 관련해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계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받아 왔다.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은 처음에는 혜공왕의 정치적 실권을 빼앗고 그 상태로 정국을 유지하였으나, 780년(혜공왕 16년) 서로 대립하던 김지정(金志貞, ?~780) 일파의 반란을 진압한 후 혜공왕까지 시해하였다. 정변에서 승리한 김양상은 곧 제37대 선덕왕(宣德王, ?~785)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나물왕/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10세손으로 중대 왕실 입장에서는 방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신라 하대에서는 왕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을 때 상대등이 즉위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후 785년(선덕왕 6년)에 선덕왕이 사망하자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으며, 귀족 집단 간의 내분이 동반되었다. 선덕왕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본래 신료들이 먼저 추천했던 사람은 서열이 김경신보다 위였던 상재상(上宰相) 김주원(金周元)이었다. 그러나 사료에서 보이듯 폭우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김주원이 왕궁에 이를 수 없게 되자 김경신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곧 원성왕이다. 그 역시 나물왕/내물왕의 12세손으로 방계 혈족이었으며, 김양상이 거병할 때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상대등이 된 인물이다. 일화에 보이는 폭우는 김경신의 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사례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유로 정상적이지 않은 왕위 계승 과정, 곧 왕위의 찬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신라 하대에 ‘원성왕계’ 왕통이 세워졌으며,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명주(溟州)로 내려가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원성왕계는 이후 왕위 계승권은 물론 대아찬(大阿湌), 병부령(兵部令), 재상 등 요직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왕의 후계자와 근친들이 최고 관직을 독식한 것은 중대 전제 왕권에서도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아울러 801년(애장왕 2)에는 5묘제(五廟制)가 완성되었는데, 이는 영세불변(永世不變)의 시조로 모시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을 5묘에서 제외하여 따로 묘를 세우고,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의 직계 존속을 5묘에 포함시킨 조치였다. 이는 사실상 중대 왕통을 단절시킨 상징적인 사건이자 왕위 계승에서 직계 상속의 관습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계 상속을 중요시하는 인식이 형성되며 나물왕/내물왕(奈勿王)계 또는 무열왕계라는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연대 의식은 약화되어 갔다. 아울러 원성왕계 혈족 집단 내부에서도 보다 작은 가족 규모 단위로 분지화(分枝化)가 일어났으며, 이렇게 나뉜 소가계 간에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원성왕계는 중대 무열왕계의 전제 왕권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제 왕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유교 통치 이념을 지향하여 율령 체제를 강화하였는데, 이는 중대의 왕들과 정치적 지향에서 다른 점이 없었다. 원성왕이 788년(원성왕 4)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한 것은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또한 805년(애장왕 6)에는 공식(公式)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같은 시기 다른 사료에 나타나는 관직명 개정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경덕왕 때와 유사한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일단 왕권을 획득한 후 이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달리 왕실 스스로 신라 고유의 사회 질서인 골품제를 개혁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이게 되었음을 뜻한다. 요컨대 유교 이념에 따른 율령 체제 강화와 골품제의 유지는 양립할 수 없는 요소였다.

왕의 자손이라면 세대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귀족 신분을 유지시키는 골품제의 특성상 하대로 갈수록 진골 귀족은 양적 증가 현상을 보였다. 따라서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이들은 원성왕 직계가족과 같은 소수였고, 그 이 외에는 근친 왕족이라도 정치에 참여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다. 그 결과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들은 지방 현령 등의 말단 관직에 머무르기도 하고, 명주군왕으로 책봉된 김주원의 예로 알 수 있듯이 반독립적인 지방 세력을 이루어 호족(豪族)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6두품 학자-관료의 증가와 진골 귀족에 대한 도전 역시 골품제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유교적 통치 이념과 율령 체제를 강화하고 진골 귀족의 합의제인 골품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군주들은 6두품을 대거 등용하고 이들의 관계 진출을 보장하였다. 본래 성골(聖骨), 진골, 6~1두품까지 8개의 신분을 이루었던 골품제는 이미 중대에 들어 성골이 사라지고 아래 3~1두품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실제로 진골, 6~4두품까지 네 신분만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중 5~4품은 최치원(崔致遠, 857~?)에 따르면 “말할 것이 못 되는” 신분이었고, 바로 위의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 할 만큼 그 차이가 현격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진골 귀족 이 외에 중앙 정부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신분이었으나, 17관등 중 제6관등까지만 승진이 허용된 탓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6두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품제 등의 사회적 제약에 비판을 가하는 반체제적 경향을 띠어 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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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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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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