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정치새로운 세력의 성장과 후삼국의 성립

후고구려의 궁예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이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861)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 ?~875)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나 있고, 또한 햇빛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옵니다. 마땅히 아이를 키우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그 사람이 포대기에서 그 애를 꺼내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인 여자 종이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이를 안고 도망을 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자 놀기만 하였으므로 그 유모가 말하기를, “네가 태어나 나라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하지 못하여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너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와 나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하였다. 궁예가 울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제가 떠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문득 세달사(世達寺)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이름 하였다. ……(중략)……

신라가 쇠약해진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이 흩어져 왕기(王畿) 밖의 주현(州縣) 가운데 반란 세력에 따라 붙는 자가 거의 반에 이르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 아래 백성이 개미처럼 모여들었다. 선종은 이런 혼란기를 타서 무리를 모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891) 신해(辛亥)에 죽주(竹州)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중략)……

경복(景福) 원년(892) 임자(壬子)에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의탁하니, 양길이 잘 대우하며 일을 맡기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으로 땅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중략)……

선종이 자기의 무리가 많아졌으므로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비로소 내외의 관직을 마련하였다. ……(중략)…… 천복(天復) 원년(901) 신유(辛酉)에 선종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으므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잡초로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출생 시에 버림을 받은 것을 원망하여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熖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冝勿養之.

王勑中使, 抵其家, 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弃於國, 予不忍, 竊養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逹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中略)……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逺近羣盜, 蜂起蟻聚. 善宗謂乗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即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中略)……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任以事, 遂分兵, 使東略地. ……(中略)……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中略)……天復元秊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壌舊都鞠爲茂草, 吾必報其讎. 蓋㤪生時見棄, 故有此言.

『三國史記』卷50, 「列傳」10 弓裔

이 사료는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 궁예(弓裔, ?~918)의 출신과 성장 및 태봉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기록이다. 이는 신라의 해체 및 호족의 존재 양상, 그리고 후삼국의 건립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궁궐에서 도망하는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고 유모의 손에서 키워졌다. 따라서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정권 다툼에 희생된 인물이거나 몰락한 진골 귀족 가문의 후예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연히 궁예는 일찍부터 반(反)신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신라의 타도와 자신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다.

궁예는 10여 세에 세달사(世達寺)로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善宗)이라고 하였다. 뒤에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칭하는 등 미륵신앙에 심취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세달사에서의 승려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 말의 혼란을 목격한 궁예는 891년(진성여왕 5년) 드디어 세달사를 떠나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승려 생활을 하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국 각지에서 대두하는 호족이나 889년(진성여왕 3년)부터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는 농민 봉기를 보면서, 궁예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궁예는 기훤에게 의탁한 다음 해인 892년(진성여왕 6) 기훤을 떠나 양길(梁吉, ?~?)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양길의 명에 따라 성공적으로 정복 활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드디어 894년(진성여왕 8년)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김주원(金周元)계와의 연대와 신라 선종의 한 일파인 굴산선문(堀山禪門)의 협조로 명주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궁예는 895년(진성여왕 9년)에 철원 일대를 점령하여 건국의 터를 마련하였다. 896년(진성여왕 10)경에는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송악에 있던 왕건(王建, 877~943) 부자의 투항을 받고, 오늘날 황해도 지역의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899년(효공왕 3년) 7월 양길의 군대를 격퇴하고, 900년(효공왕 4년) 10월에는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통일 이후 신라가 재편한 9주 중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되었던 명주⋅삭주⋅한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901년(효공왕 5년)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지역적으로 고구려 유민의 호응을 얻고자 그 계승국임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04년(효공왕 8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고치고, 광평성(廣評省)과 병부(兵部)를 비롯한 여러 관부를 설치하는 등 중앙 정치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905년(효공왕 9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기고, 강성해진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를 병합할 뜻을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911년(효공왕 15년) 궁예는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스스로를 미륵불로 칭하고,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과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고 하며 신격화하였다. 또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내세워 강력한 전제 정치를 행하여 많은 원성과 불만을 낳았다. 결국 918년 6월 홍유(洪儒, ?~936)⋅배현경(裵玄慶, ?~936)⋅신숭겸(申崇謙, ?~927)⋅복지겸(卜知謙, ?~?) 등 4명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그는 도망쳐서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부양(斧壤, 강원도 평강)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고 전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궁예정권의 성립과 변천」,『남사정재각박사고희기념동양학논총』,이정신,동양학논총 편찬위원회 편,1984.
「궁예의 세력형성 과정과 도읍 선정」,『한국사연구』97,정선용,한국사연구회,1997.
「궁예의 호족세력」,『전북사학』10,정청주,전북대학교 사학회,1986.
「후백제와 태봉관련 연구동향과 전망」,『신라문화』27,조법종,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6.
「궁예정권의 지지세력」,『동국사학』19⋅20,최규성,동국사학회,1986.
저서
『후삼국사』, 신호철, 개신, 2008.
『후삼국시대 궁예정권 연구』, 이재범, 혜안, 2007.
『태봉의 궁예정권』, 조인성, 푸른역사, 2007.
편저
『궁예의 나라 태봉』, 김용선 편, 일조각, 2008.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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