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경제통일 신라의 경제 체제

궁중 수공업

내성(内省)은 경덕왕(景德王) 18년(759)에 전중성(殿中省)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후에 예전으로 [이름을] 되돌렸다. 사신(私臣)은 1명이다. 진평왕(眞平王) 7년(585)에 3궁(宮)에 각기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대궁(大宮)에는 화문(和文) 대아찬(大阿湌), 양궁(梁宮)에는 수힐부(首肹夫) 아찬(阿湌), 사량궁(沙梁宮)에는 노지(弩知) 이찬(伊湌)을 두었다. [진평왕] 44년(622)에 이르러 한 사람으로 3궁을 아울러 관장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39, 「잡지」8 직관(중) 내성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이] 즉위하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삼국유사』권2, 「기이」2 48 경문대왕

内省, 景德王十八年, 改爲殿中省, 後復故. 私臣一人. 眞平王七年, 三宮各置私臣, 大宮和文大阿湌, 梁宮首肹夫阿湌, 沙梁宮弩知伊湌. 至[眞平王]四十四年, 以一員兼掌三宮.

『三國史記』卷39, 「雜志」 8 職官(中) 内省

乃登位, 王耳忽長如驢耳. 王后及宮人皆未知, 唯幞頭匠一人知之.

『三國遺事』卷2, 「紀異」2 四十八 景文大王

이 사료는 신라의 궁중 수공업을 총괄하였던 관부인 내성(内省)의 설치와 변천 과정, 그리고 실제 궁중에서 수공업품을 생산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장인의 존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 권39의 직관지(중)에는 내성 기사에 뒤이어 내사정전(內司正典), 전대사전(典大舍典), 상대사전(上大舍典) 등 모두 29개의 생산 관련 관부의 명칭과 연혁이 등장하는데, 이들 관부는 모두 내성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성의 설치와 정비 과정은 신라 궁중 수공업의 성립 및 운영과 직결되어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585년(진평왕 7)에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등 3궁에 각기 사신(私臣)을 두었다가 622년부터 한 사람이 3궁을 함께 관장하였다고 하는데, 내성은 여기에 기원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뿐만 아니라 본피부(本彼部)⋅모량부(牟梁部)⋅한지부(漢祗部)⋅습비부(習比部) 등 신라 6부(部)에는 각각의 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궁에는 일정한 재화(財貨)와 토지, 노복(奴僕) 등이 있었는데, 622년(진평왕 44)에 내성 사신(內省私臣) 한 사람으로 하여금 3궁을 관장하게 한 것은 각 궁에 속해 있던 재화 등을 내성 산하의 관부로 편제시킨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 나머지 궁도 이후 비슷한 절차를 거쳐 내성에 편제되었으리라고 이해된다. 따라서 내성의 성립 과정은 각 부별로 존재하였던 궁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내성 산하로 귀속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각 궁의 생산 체계도 자연스레 내성 산하의 관부로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신라에는 궁중 수공업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내성의 관할 하에 궁중 수공업을 담당한 관부의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철유전(鐵鍮典)은 광물류 제작을, 남하소궁(南下所宮)은 금은 세공품 제작을 맡았다. 소전(䟽典)은 누에고치를 켜는 일을, 표전(漂典)은 실을 정련한 후 표백을, 염궁(染宮)과 홍전(紅典), 찬염전(攢染典)은 직물의 염색 관련 일을, 금전(錦典)과 조하방(朝霞房), 기전(綺典)은 종류별 옷감 생산을 담당했다. 또한 피전(皮典)은 가죽 관련 일을, 추전(鞦典)은 말과 소의 턱밑으로 돌아가는 가죽 끈 제작을, 피타전(皮打典)은 북에 필요한 피혁물 제작을, 탑전(鞜典)은 가죽 신발 제작을, 화전(靴典)은 가죽 장화 제작을 맡았다. 그리고 마전(磨典)은 목기(木器) 제작을, 석전(席典)은 자리 제작을, 궤개전(机槪典)은 지팡이와 책상 등의 제작을, 양전(楊典)은 대나무 관련 제품의 제작을 각각 담당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신라의 궁중 수공업은 생산 물품별로 매우 분업화되어 있는 동시에, 직물류나 가죽 제품 등은 개별화된 각 관부에서 긴밀한 협업을 통해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궁중 수공업에 종사하였던 장인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찾아보기는 어려운데, 그나마 『삼국유사』 권2에 수록된 경문대왕조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이 즉위하자 왕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변하였는데, 오직 복두장(幞頭匠)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왕후나 궁인도 몰랐던 사실을 복두장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여기에 등장하는 복두장은 내성 산하의 관부에 소속되어 국왕의 복두 제작에 종사하였던 궁중 수공업 장인으로 볼 수 있다. 복두장처럼 궁중 수공업 관부에 소속된 이들은 17 관등 중 대체로 13 관등인 사지(舍知)나 그보다 아래의 사(史)에 준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신분상으로는 대개 4 두품 정도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울러 그들은 궁중에 소속된 노비를 거느리고 해당 관부에서 정해진 물품을 생산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궁중 수공업 관부의 직원은 100여 명에 이른다. 그렇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관부까지 포함할 경우에는 약 200명에 가까운 인원이 궁중 수공업 관부에서 하급 관리로 근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궁중수공업관사의 운영과 변천」,『신라문화』10⋅11,박남수,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1994.
「신라 궁중수공업의 성립과 정비」,『동국사학』26,박남수,동국사학회,1992.
「통일신라 궁중수공업의 운영과 변천」,『소헌남도영박사고희기념 사학논총』,박남수,민족문화사,1993.
저서
『신라수공업사』, 박남수, 신서원, 1996.
편저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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