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사회진골 귀족의 호화로운 생활상

신라 왕경의 풍요

[헌강왕 6년(880)]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라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邊境)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경(卿)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6년 9월 9일

[憲康王六年] 九月九日, 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閒,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甞聞之如此. 因奏曰, 上即位以來, 隂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邉境謐靜, 市井歡娛, 此聖徳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徳焉.

『三國史記』卷11, 「新羅本紀」11 憲康王 6年 9月 9日

이 사료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대 경주의 번영과 백성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보여 주는 사료이다.

880년(헌강왕 6년) 9월 헌강왕은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비롯한 신하 몇 명을 거느리고 월상루(月上樓)라는 누각에 올라가 왕경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신하들과 함께 백성들의 집이 기와지붕으로 연이어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을 두고 왕과 신하들이 서로 치하하였다.

물론 경주 내 모든 백성이 윤택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미루어 적어도 헌강왕 대에는 왕경의 많은 백성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던 것 같다.

그런데 헌강왕 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사료는 신라의 번영, 그 자체보다는 신라의 몰락과 관련하여 좀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즉 사료에 보이는 풍요로운 왕경인의 모습은 풍요가 아닌 사치스러움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당시 경주인의 사치는 과도한 조세 수취나 귀족들의 사적인 수탈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왕경과 왕실의 소비가 증대할수록 지방민에 대한 조세의 수취는 증대되었고 지방관은 더 가혹하게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사치스런 생활은 줄어들지 않았고, 이에 대한 반발의 분위기도 갈수록 커져 갔다. 결국 진성여왕 대 전국적으로 지방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신라의 몰락은 이미 헌강왕 대의 번영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하대 헌강왕의 친정체제 구축과 위홍」,『신라사학보』5,송은일,신라사학회,2005.
「신라 헌강왕의 즉위와 정국 운영」,『울산문화연구』2,신형석,울산 남구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2009.
「삼국사기에 보이는 이슬람 상인의 무역품」,『이홍직박사회갑기념 한국사학논총』,이용범,신구문화사,1969.
「삼국유사 소재 처용설화의 일분석-고려 기인제도의 기원과의 관련에서-」,『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이우성,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편찬위원회,1969.
「헌강왕대의 정치사회와 처용랑망해사조 설화」,『신라문화』26,전기웅,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5.
「신라 경문왕⋅헌강왕대의 ‘능관인’ 등용정책과 국학」,『동아연구』17,전미희,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1989.
저서
『신라의 멸망과 경문왕가』, 전기웅, 혜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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