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사회백성들의 삶과 윤리

향덕의 효도 이야기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하여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755년 경덕왕 14년) 을미(乙未)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편안히 위로하였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먹게 하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모두 완쾌시켰다. 향사(鄕司)가 주(州)에 보고하니,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벼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일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孝家)’라고 부른다.

삼국사기』권48, 「열전」8 향덕

向德態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㿈,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㿈,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人號其地云孝家.

『三國史記』卷48, 「列傳」8 向德

이 사료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에 살았던 효자 향덕(向德)에 관한 내용이다. 향덕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5, 효선(孝善)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조와 『삼국사기』권9, 경덕왕 14년(755)조에도 전하는 데,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향덕의 이름이 ‘향득(向得)’으로 되어 있다.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755년(경덕왕 14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향덕의 부모도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그의 효행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755년 봄 신라에는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라 경덕왕 대에는 유난히 자주 흉년과 기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745년(경덕왕 4년) 5월, 746년(경덕왕 5년) 가을과 겨울, 754년(경덕왕 13년) 8월에 가뭄과 전염병 등이 발생하였다. 특히 13년 8월에 있었던 가뭄과 병충해는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년) 봄의 전국적인 기근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재해는 국가적으로도 크게 문제되어 756년(경덕왕 15년) 2월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해마다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는 일을 가지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해마다 가뭄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만연하자 향덕은 부모 공양의 길이 막연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향덕’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지(舍知)는 신라 17관등 중 1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체로 4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따라서 향덕이 원래 4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가 사지라는 관등에 오른 것이 포상 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덕이 4두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실제 생활은 극히 빈곤해서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근에 역병까지 겹쳐 부모가 모두 거의 죽게 되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와,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부모의 병을 낫게 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해 주(州)의 보고를 통해서 알게 된 경덕왕은 향덕에게 포상하였다. 즉, 곡식과 집⋅토지를 내리고 거기에 더하여 비석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할고 효행과 그 효행에 대한 국가의 표창은 모두 우리 역사상 처음 보이는 사례이다. 특히 비석, 즉 정려비(旌閭碑)를 세우도록 한 조치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사실 당시 당(唐)나라의 경우는 효자⋅효녀나 열녀 등에 대하여 그 가문과 고을을 정표(旌表)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덕왕 대에 이르러 향덕에 대한 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경덕왕이 취한 향덕의 효행에 대한 조치는 대민 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교화 정책으로서, 우리나라 정표 정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화정책(漢化改策)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또한 당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포상은 바로 당시 중국에서 보편화한 유교적 윤리, 또는 일종의 효치주의(孝治主義)의 구현과 짝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당시 민심의 동요가 우려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덕치(德治)의 규범을 보이고 대민 교화를 지향함으로써 계속되는 재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아 보고자 한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향덕의 이야기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행 포상 사례이자 포상의 첫 사례로서, 유교적 윤리의 수용과 그 시행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향덕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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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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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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